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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72

w. 연하

*위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 단체 및 국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허상이며, 소설의 설정임을 알려드립니다.

 

 

 

 

 

2025년, 둘로 갈라져 힘이 분산되었던 한반도가 두 국가가 모두 존재하는 체계로 통일을 했으며, 그에 따라 해상권의 힘보다 지상권의 힘이 더 높아졌다. 이젠 한반도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지점까지 갈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해상무역보다 지상무역이 몇 배는 빠른 무역로가 된 것이다. 이전까지의 모든 무역은 해상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지상 무역은 서로 다른 체계의 두 국가가 자리 잡고 있는 한반도에 의해 막혀있던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원활한 통행이 가능해졌으며,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러시아가 한반도의 두 나라가 통일이 된 즉시 무역협약을 내밀었으며, 이는 단번에 실행되었다. 그리하여 전세계의 해상권의 중심에 있던 미국은 자신들이 가질 수 없는 지상권을 가지려 들었으나, 이는 적절한 때에 멈추지 못하여 전쟁으로 이어졌다. 2027년, 곧 시작될 듯한 전쟁을 제3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한반도는 70년도 넘게 정전의 형태를 가졌던 곳이다.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모르는 공포가 잊혀질 정도로 그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하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전쟁에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미국은 전쟁은 준비되는 대로 시작할 것이라고 말하며,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중국은 무역협약을 맺은 세 개의 나라가 연합하여 미국의 공격에 맞설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한반도 공동정부는 아무런 입장도 내비추지 않은 상황입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나라가 독립적인 존재인 것을 인정하면서 맺은 평화협정, 통일이었기 때문에 독립된 두 정부가 원활한 소통을 통해 한반도 공동정부의 이름으로 입장을 밝히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한대로, 중국이 내놓은 입장과 같이 한반도 공동정부는 미국의 공격에 맞설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전쟁은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전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 받는, 권력을 가져오고 수많은 생명을 버리는 것이 전쟁이다. 아무런 희생과 대가 없이는 누군가의 손에 있는 무언가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권력에 있어서 그것은 더욱 그랬다. 수많은 희생과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만했다. 물론 그 선택권이, 전쟁을 하는 이들의 손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을 발발시키는, 전쟁을 지휘하는 자들의 손에만 있는 것이었다. 그게 권력이었다. 타인을 희생시키면서도 권력을 약탈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들. 그것은 한 세기가 지나도 변하지 않은 구조의 밑바닥이었다.

 

 

2027년 4월, 미국화학연구소 AIC

 

“M-160 실험 결과 보고하겠습니다.”

“주입 후 30초 뒤 발작, 1분 뒤 혈색이 변하기 시작하며 실험체 스스로가 정신적 혼란에 빠져 패닉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발작이 멈춘 시각으로부터 10분 뒤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실험체는 어쨌나.”

“사살 했습니다.”

 

정박사가 볼펜으로 보고서를 툭, 툭, 하고 힘없이 쳤다. 고민에 빠진 듯 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더니 볼펜을 달칵, 하고 눌러 보고서 한쪽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정박사가 실험결과를 보고했던 팀장을 가까이오라고 손짓했다.

 

“자, 생각을 해봅시다.”

“포로가 적진에 끌려가 적절한 시기에 변하려면, 반응이 더욱 늦어야 할걸세.”

“완전히 변하는 것 까지 최소 30분, 그 이하는 턱없이 부족하니 최대한 몸 안에 퍼지는 속도가 느리게 연구해보게.”

 

팀장의 명찰을 매단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따라온 사람들과 함께 나갔다. 팀장의 뒤에는 총을 들고 방탄조끼를 입은 특전사 출신의 군인 둘이 따라 붙었다. 길게 늘어진 복도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벽과 천장이 온통 하얗고 지나치는 좁은 방들의 문만 회색빛이 도는 단단한 철문이었다. 팀장은 줄지어있는 방과 보이는 방 내부에 한 치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복도 끝까지 소리 내어 걸었다. 꽤나 긴 복도를 지나니 처음에 지나쳤던 방들보다 더 큰 방들이 보였고, 그 방들 중 하나가 문이 열리며 휠체어가 나왔다. 휠체어를 끄는 사람은 팀장의 뒤를 따르던 군인과 같은 복장이었으며 한 가지 다른 점은, 조끼에 꽂힌 총 옆에 두툼한 주사기가 하나 꽂혀있다는 것 이었다. 검은 헬멧까지 쓴 군인이 문을 열곤 휠체어를 밀며 나왔다. 팀장은 문이 열리자 그 앞에 멈춰 섰다. 팀장을 보자마자 군인은 문을 닫곤 입을 열었다.

 

“새로 잡혀온 놈입니다.”

“어디서 온 건데.”

 

팀장이 정신을 잃은 채로 검은 안대로 눈이 가려진 사람을 보고 물었다. 정신을 아예 잃었는지 고개가 축 쳐져 있고, 살짝 길어 눈썹을 덮는 앞머리가 이마를 보이는 게 보통인 미국의 스타일과는 전혀 달랐다. 팀장이 휠체어에 탄 사람을 한번 보더니 이내 휠체어를 이끌던 군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넘겨주는 대로 받아온 거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찾아볼까요?”

“어차피 가족, 친구 그런 거 하나 없는 놈들 잡아 오는 거라 상관없어. 방 남는 거 있나?”

“오늘 죽은 160의 옆방이 비었습니다.”

“그래, 거기로 보내.”

 

팀장도, 휠체어도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제 갈길을 갔다. 팀장은 복도 끝, 엘리베이터를 탔고, 휠체어와 그를 이끄는 군인은 반대편으로 향하다 ‘014’라고 적힌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여니 복도와 마찬가지로 온통 하얀 벽과 침대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침대의 위와 아래, 그리고 양 옆에 달린 쇠 수갑은 일반적인 방에 걸맞진 않았다. 군인이 축 처진 남자를 들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바로 옆에 있는 책상 위에 있는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일시, April 7th, 2027.

관리자, Jun

 

 

 

 

“깨어났네요, 안 일어날 것처럼 굴더니.”

 

석진이 깨자마자 검은 군복과 조끼, 헬멧을 쓴 군인이 바로 옆에서 석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석진이 그 군인을 쳐다보지도, 눈을 감지도 않고 눈 뜬 그대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군인이 석진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바로 어제, 자신이 쓴 일지가 놓여있었다. 관리자 Jun. 그게 그의 이름인 듯 했다.

 

“한국인이죠? 나도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에요. 우리만 있을 때는 한국말 써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얘기해요.”

 

여전히 석진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원래 이름은 김남준인데, 다들 짧게 ‘준’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자신이 당신의 관리자이고, 당신과 24시간 중 20시간을 붙어있을 사람이라고. 그러니 나에게 적대감을 갖지 말아달라고.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그 중 석진의 말은 없었다. 여전히 석진은 눈만 뜬 채로 모든 것이 무의미 하다는 듯 누워있었다. 아무 말 없는 석진에 준이 묵묵히 자리만을 지켰다. 시간이 계속 지나고, 가만히 눈을 뜨고 있었던 석진이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자 보인 것은 침대의 아래에 달린 쇠 수갑이 석진의 발을 붙잡고 있던 것이었다. 인기척에 고갤 떨구고 있던 남준이 고개를 들어 석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기 오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랬다. 발이 묶여있음에도 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거나,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울거나, 죽으려고 하거나. 하지만 석진은 지나치게 아무 말도, 행동도 없었다. 탈색을 했다가 희미하게 물들인 것 같은, 완전히 흑발도, 염색한 회색도 아닌 색이 평생을 금발로 살아온 남준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이곳에 온 것도 벌써 7년, 그동안은 이 기지 부근 말고는 거의 나가본 적이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 사람들이 어떤 것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핸드폰으로 밖에 접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고향인 한국은 한반도 공동정부로서 선전포고를 한 미국에 맞서겠다고 한 뉴스를 남준도 똑똑히 봤다. 허나 남준은 미국 정부의 군인으로서 근무하고 있었고, 미국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는 전쟁에 쓰이는 무기를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근무 중이었다. 아주 충실한 근무자 중 하나로. 그래서 남준은 전 세계에서 흐르는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혼란을 겪는 사람 중 하나였다. 청소년기에 부모님을 잃고 직업군인을 꿈꾸며 이 곳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이 곳에서 만들어지는 무기들이 부모님과 자신의 고향에 쏟아질 것을 생각한다면, 계속 이 곳에 있는 게 맞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했다. 그런 시기를 겪는 남준에게 석진은 알맞은 시기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남준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잡혀 들어온 석진의 심정까지 이해하진 못했다.

 

“차라리 죽이지 그랬어요.”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로 석진이 말했다. 석진이 처음으로 입을 떼 한 말이었다. 말을 마치고 석진은 무언가를 증오하는 눈빛으로 남준과 눈을 맞췄다. 그러나 석진은 이것조차 아무 의미 없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떨궜다. 사실 남준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준도 상부에 지시대로 실험체, 그니까 각자 방마다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얘기다. 군인은 상부의 지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특히나 그 구조가 무거웠다. 그러니 남준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석진도 그를 아는 듯 남준을 원망하기를 지금 당장은 그만 둔 듯 보였다. 석진은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을 통해, 누군가를 원망하고 죽기보다 살아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이 순간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원망하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식물은 도태되고, 동물은 순응하며 인간은 창조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석진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순응하기로 했다. 이 곳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자신은 준이라고 소개하는 이 사람에 대한 정보 등 지금의 자신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준.”

“......”

“내가 언제부터 이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보고서로 제출하라고 했었나.”

“.... 죄송합니다.”

 

 

남준에게 지시를 내리는 상부, 팀장이 남준을 호출했다. 어제 밤, 남준이 제출한 보고서 때문이었다. 2027년, 굳이 손으로 보고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지만 이 연구소는 세 개의 출입문 마다 무장군인을 세울 만큼 보안이 센 편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데이터로 남기지 않고 직접 관리자의 자필로 써 보관했다.

남준이 관리하는 실험체 M-172에 대한 보고서를 팀장이 책상에 내리꽂았다. 책상과 보고서가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준, AIC 소속군인이 지켜야할 것 4번째, 읊어봐.”

“실험체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궁금증도, 호기심도 품지 않는다.”

“그래.”

“뭐가 문제인지 한 번 읊어줘야 아나?”

“죄송합니다.”

 

팀장이 헛웃음을 지으며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M-172, 상태 양호. 건강상의 문제는 없어 보임.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어떠한 부탁 또는 애원의 말도 하지 않음. ...... 한국인으로 추정되며, 조금 특이한 M-172가 궁금해짐.’ 이라니... 일기장도, 다이어리도 아닌 보고서를 이딴 식으로 쓰다니. 팀장이 다시 보고서를 펼치더니 남준이 쓴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볼 일 없다는 듯 대충 선반에 꽂아 넣었다. 팀장이 남준에게 이만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남준이 팀장의 업무실을 나와 어김없이 014방으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 침대에 앉아있는 석진이 남준의 상황을 대충 알아챘는지 남준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폈다. 한소리 들었나보지, 석진이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남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사심 섞어서 보고서를 쓰는 바람에.’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당신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보는 앞에서 사살당할 수도 있는데 당신이 궁금해졌다고,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공과 사를 구분함을 떠나, 사적인 것은 어떠한 것도 가지면 안됐다. 허나 남준은 석진이 궁금했다. 어떤 사람인지,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이 관리하던 실험체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남준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잡혀온 거라고요..?”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은 청소년기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고모의 집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석진은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 덕에 언제나 주위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고 사람을 잘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석진이 취직을 하게 된 곳은 일종의 흥신소, 라고 해야 할까. 시키는 일을 수행하면 되는 그런 일말이다. 사람과의 대면을 싫어했던 석진은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었고 우연히 한 흥신소의 직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렇게 일을 해온지 2년, 석진은 그 중에서도 베테랑이 되었고 막중한 의뢰가 들어오면 석진이 도맡아 하게 되는 상황까지 다다랐다. 그렇게 석진은 평소와 같이 의뢰메시지를 열었는데, 의뢰비 선입금 1억에 성공 시 1억을 더 얹어주겠다는 이제까지 받아보지 못한 의뢰를 받게 되었다. 1억이면 자잘한 의뢰를 20번은 받아야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회사의 몫으로 돌아가는 돈이 있다고 해도 엄청난 인센티브가 붙었고 그 정도라면 혼자 편하게 살 수 있는 집하나 정도는 살 수 있었다. 물가는 계속 치솟는 바람에 집을 사지도 못하고 비싼 전세에 매달려 사는 석진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석진은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허나 의뢰인이 조사해달라고 의뢰한 곳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 석진은 한두 가지가 아닌 이상한 점들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연구소가 비정상적으로 외진 위치에 자리해있었고, 가는 길에 있는 마지막 집에 물어보니, 한번은 미친 것 같은 사람이 겨우 보일만큼 멀리서 뛰어왔을 때가 있었는데 뒤에 쫓아오던 사람이 총을 쐈는지 오다가 픽 쓰러지더라,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입구에는 빈 검문소가 있고, 차가 들어갈 수 없게 막혀있고, 주변 CCTV를 보면 일주일에 한 번씩 차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칠이 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대형승합차. 하지만 옛 자료에 따르면 이 부근에 화학연구소가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있는 바가 없었다. 결국 드론을 통해 높이서라도 외부를 확인하려고 드론을 띄워 건물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을 때, ‘탕’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 드론에 총기를 소지한 군인 등의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을 확인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의뢰인이 의뢰한 만큼의 정보는 습득하지 못하여 의뢰를 완성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석진이 머리를 쥐어짜며 늦은 밤 집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고, 마침 그때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철컥,”

‘선배! 국가기밀문서들을 파헤치던 중에 일 년 전부터 그 부근 화학 연구소에서 바이러스 실험을 시작했다는 정보가 있어요. 그 바이러스가,’

“손 들어.”

‘좀비래요. 감염바이러스 Z가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아는 그 좀비에요.’

“그거 내려놔”

‘....선배? 듣고 있어요? 선배!’

 

석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소속을 알 수 없는 무장군인이 석진의 핸드폰을 밟아 으스러트렸다. 잡아, 명령이 떨어지고 다섯 명의 군인들 중 두 명이 석진을 붙잡았다. 석진이 이리저리 몸서리 쳐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거센 포박이었다. 그러곤, 어딘가를 세게 맞고 정신을 잃었다. 석진이 차에 실려 오는 동안 희미한 정신으로 본 것은 검은 차 내부와, 자신 말고도 정신을 잃은 여럿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자신을 잡으러왔던 군인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금발의 군인이 하나 있었다. 그게 남준이었다.

 

“사실 아직도 모르겠어. 나를 어떻게 알고 조사해 온 건지.”

“......”

“여기에 오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거, 나도 알아.”

“널 어떻게 믿겠어. 너도 모두 한패인데. 근데 네가 일러바쳐 그 덕에 내가 빨리 죽게 되던, 난 어차피 죽을 거니까. 그래서, 너한테 말하는 거야.”

 

남준은 자신이 관리하는 실험체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됐으니까. 그런데 남준은 처음으로 석진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고 석진이 자신을 나쁜 쪽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준은 한 번도 자신이 하는 일이 좋지 않은, 양심에 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실려 온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이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의 관할이 아니라는 이기적인 생각만 반복해왔다. 하지만 남준은 석진의 말, 그리고 석진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처음으로 관심이 생긴 사람이 자신을 인간을 실험체 삼아 화학실험을 하는 비인도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 이 두 가지가 여태껏 남준을 흔들던 그 어떠한 것 보다 크게 뒤흔들었다.

 

석진이 이곳에 온지 5일이 되고, 실험실에서 남준을 호출했다. 석진을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남준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석진의 발에 묶인 수갑까지 풀었지만 차마 문을 열고 나갈 수 없었다. 석진도 알다시피 결과는 뻔했다. 석진이 실험체로 쓰일 것이고, 얼마 뒤 남준을 알아볼 수도 없는 괴물로 변할 것이다. 그것은 석진도 어느 정도 예감했던 터였다. 잡혀오기 전, 급히 전화를 걸어온 후배의 말에 따르면 이 곳은 제 3차 세계대전을 위한 화학 살상무기가 만들어지는 곳이고, 그 중 하나가 감염바이러스 Z, 좀비 바이러스 추정됐다. 걸음을 멈춘 남준에 석진도 남준이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다. 오랜만에 짚는 땅이 어색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 토할 수 있어요?”

“지금... 뭐라고 했어?”

“말 낮춰요. 크면 CCTV로 들리니까.”

“.... 토하고, 그 다음엔 어쩔 건데.”

 

“그리고 왜 나를 안 보내는 거야. 상부의 명령이잖아. 걸리면 너도 죽어.”

“하...”

 

남준이 깊은 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도... 모르겠어요. 왜 그쪽을 살려주고 싶은 건지. 나도 알아요, 가면 죽는다는 거. 그래서, 그래서.... ” 머리가 복잡한 듯 남준이 석진을 등지고 서, 머리를 쥐어뜯으려다 마른세수를 했다. 석진도 남준도 무척 답답한 듯 보였다. 남준이 석진을 등진 채로 다시 조용히 말했다.

 

“일단 내가 말하는 대로 해요. 이거 아니면 괴물 돼서 죽는 거 둘 중 하나니까.”

“......”

“내가 나가면 토하면서 쓰러져요. 그럼 내가 들어와서 놀라면서 미루자고 해볼게요.”

“그럼... 오늘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죽는 거잖아.”

“방법이 없잖아요, 당신이 살려면 어쩔 수 없어요.”

“아니, 난 다른 사람이 살 기회까지 놓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어차피 다 죽어요. 석진씨, 선택해요. 내 말대로 할 건지, 그냥 죽을 건지”

“......”

 

남준이 석진의 손을 이끌어 수갑을 하나 채우고 문 밖으로 나섰다. 남준이 긴장을 하며 심장박동도 덩달아 빨라졌다. 터벅, 터벅, 복도에는 남준의 발소리만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울려 퍼지는 발소리와 함께 자신의 거친 심장박동이 밖으로 들릴까, 남준은 심호흡을 내셨다. 그리곤, 실험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팀장님, Jun입니다.”

“어, M-172 데리고 오라고.”

“네.”

 

남준이 다시 실험실에서 나와 석진이 있는 014로 향했다. 석진이 제대로 쓰러져 있어야했다. 일부로 걸음을 늦추다가도 혹시 누가 볼까,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는 남준. 그리고 문 앞에 다다르자, 문의 투명유리 사이로 침대 위에 쓰러져있는 석진이 보였다. 남준이 문을 벌컥 열고는 바로 실험실에 무전을 취했다.

 

“014 관리 Jun입니다. 실험실 호출로 다녀온 사이에 M-172가 구토를 하고 쓰러진 듯 보입니다. ”

“호흡 체크해봐.”

“숨은 쉬고 있으나, 불안정 합니다.”

“......”

‘015, M-173 호출한다. 014로 의료진 하나 보내겠다.’

‘실험체가 부족한 상황이니 사살하진 않으나,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부르겠다.’

 

남준이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것들을 수습하고 나니 의료진 한 명이 도착했다. 그의 명찰에는 Yoon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었다. 명찰을 단 사람들은 적어도 의료진 중에서는 팀장급의 사람이었다. 그가 석진을 바르게 눕히고 이리저리 행태를 살폈다. 그러곤 허리에 손을 짚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뭐하자는 겁니까, 지금.”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석진이 그 말에 보이지 않는 손을 꽉 쥐었다. 아무래도 석진이 거짓으로 구토를 하고 누워있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윤기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Jun, 지금 이 실험체 살리려고 상부에 거짓보고를 한 것 입니까?” 윤기가 남준을 정확히 노려봤다.

 

“대충 진단 해봐도, 별 문제가 없다는 건 Jun도 아실 텐데요.”

“......”

“왜 그러는 겁니까.”

 

남준이 할 말을 찾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도 있다는 듯 어.... 하며 뜸을 들였다. Yoon, 나중에 다시 설명할게요. 당분간만 비밀로 해줘요, 남준이 결국 입을 열지 못하고 윤기의 등을 떠밀었다. “이거 걸리면 나도 당신도 죽는 거에요.” 윤기가 한숨을 푹 쉬더니 적을 것도 없는 진단서를 길게 쓰고는 남준의 손에 쥐어줬다. 그리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일단 고비는 넘겼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빠져나간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국가가 은밀하게 관리하는 화학무기연구소다. 이게 국제사회에 알려진다면 국가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경비가 아주 삼엄하며 남준이 연구소를 나갈 때도 철저한 검사가 필요했다. 남준이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뒷머리를 탈탈 털고 의자에 앉아, 윤기가 쥐어준 진단서에 눈을 붙였다. 헌데, 거짓으로 써준 진단서 외에 조그맣게 적힌 메모가 있었다. ‘밤에 내 방으로 와.’ 남준의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세게 한 마디 하려나, 저번처럼 깨지려나, 상부에 알려져 죽기라도 하려나. 일단 내일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내일 석진이 실험실로 들어가기 전,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불이 꺼진 방 안에는 잠들지 못한 석진이 몸을 뒤척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준이 그런 석진을 보더니 “좀 자요, 여기 온 뒤로 한 번도 눈 붙인 적 없으면서.”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떻게 잠이 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

“나한테 괜히 마음 쓰지 마. 원래 네가 하던 일이잖아. 이런 거.”

“.... 있잖아요. 하고 싶은 말 있는데, 해도 돼요?”

“어차피 들어도 내일이면 죽을 텐데, 해봐.”

“.......”

 

“사실 나 이제까지 이게 어떤 일인지도 잘 몰랐어요. 사실 이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변명처럼 들릴 거 알아요.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 세 자리수가 다 되어갈거에요.”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나한테 그랬잖아요. 어차피 나를 죽이려는, 세상의 일부분을 전쟁으로서 갈취하려는 세력과 한패가 아니냐고. 그런데 따지고 보니 맞는 거에요. 난 이들의 일에 동조하고 그 밑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근데, 당신한테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싫었어요. 처음으로 어떤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의 행동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미칠지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당신이 죽는 게 싫어요.”

 

“내가, 좋아하나 봐요. 당신을.”

 

석진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준은 엄연히 자신을 납치하고 곧 실험에 쓰는 사람들과 한패라고 생각해왔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남준은 석진이 자신에게 한 말들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괴감과 죄책감을 가지게 됐다. 석진은 그저, 잡혀온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원망 그 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하지만, 석진은 그렇게 남준을 다시 봤다. 자신이 죽는 게 싫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꼭 내보내야겠다는 남준을.

 

“내가, 나가게 해줄게요.”

 

염치없는 말이지만, 나를 믿어줘요. 한 번만이라도, 내일 단 하루 만이라도.

 

 

 

 

 

 

“Jun, M-172 실험실로 보내기 바란다.”

“확인했습니다.”

 

남준이 석진이 탄 휠체어를 밀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나, 한 번만 믿어줘요.” 석진이 그 말에 미동도 없이 식은땀이 흐르는 손을 꾹 쥐었다.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어 실험실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여러 보호 장비들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석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수술대 위에 손발이 고정된 채로 누워있는 사람이 보였다. 눈만 뜬 채로 잠이든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 옆 유리창 너머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 열댓 명 가만히 서있는 것이 보였다. 총 두 개의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 곳에는 미동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한 곳에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는 유리창에 머리를 쿵쿵 박고 있는 한 사람, 아니 사람의 형체가 아닌 무언가가 있었다. 형체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석진이 그 모습에 더 손을 떨었다. 몸이 경직되어 수갑을 풀고 일으키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수술대 위에 눕혀졌다. 남준이 목례를 하고는 실험실을 나갔다. 석진이 바들바들 떨다가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실험실 안 사람들은 수술대 위에 눕혀져있던 사람의 팔에 무언가를 주사하는 듯 했고,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때 쯤 옷에 타이머를 맞춰 꽂아놓았다. 잠이든 것 같았던 사람을 일으켜 열댓 명이 몰려있던 방에 넣어놓으니 그 사람도 똑같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동식 수술대 하나가 빠지니 그 자리에 석진이 묶여있는 수술대가 움직여 들어갔다. 두려움에 계속 눈물이 났다. 묶인 손과 발을 이리저리 빼려고 해도 고정되어있는 철 수갑은 미동도 없었다. 사람들 중 제일 높은 직급으로 보이는 사람의 명찰이 보였다. 팀장, 그 사람이 석진의 팔을 걷고 주사를 하려는 듯 혈관을 찾아 누르고 그 위에 소독 솜을 문질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사람이 꾹 다물어 열지 않는 석진의 입을 억지로 열어 솜을 집어넣었다. 혀를 깨물어 죽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석진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고,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혼미해져갔다. 그때, 동물도 사람에서도 나올 수 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 하고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석진의 귀에도 전해져왔다. 석진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실험체들이 모여 있는 유리창을 바라봤다. 두 번째 칸에 있던 실험체 하나의 몸에 바이러스가 완전히 퍼진 것 이었다. 그 실험체가 사람들이 있는 쪽을 노려보다가 다른 실험체들을 물어뜯기 시작하더니, 유리창에 핏자국이 흩뿌려지고 두 번째 간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 칸에는 시간이 투여한지 많이 지난 실험체 서너 명이 있었고, 그 실험체들이 모두 뜯기더니 첫 번째 칸으로 통하는 유리창을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질 듯 유리창에 박고, 비명을 지르며 그 칸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쳤다. 팀장이 무전을 통해 유리창을 닫으라는 말을 했고 이내, 유리창에 검은 벽이 씌워지더니 순식간에 모든 소리가 없어지며 고요해졌다. “마저 하지.” 팀장에 말에 앞에 서 있던 하나가 보관되어있던 주사기 하나를 꺼내 건넸다. 입에 담긴 솜 때문에 숨이 더욱 막혀오는 듯 했다. 석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팔에 바늘이 들어오는 느낌이 생생했고, 따라 들어오는 무언가가 팔부터 어깨, 상체, 그리고 하체까지 온 몸에 천천히 퍼져나갔고 그 고통에 석진이 막힌 비명을 내질렀다. 이리저리 몸서리쳐봤지만 석진의 발을 힘껏 붙잡아 마지막까지 주사를 마친 팀장이 다 쓴 주사기를 옆에 두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석진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몸이 썰리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만이 석진을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가 첫 번째 칸과 두 번째 칸 사이의 유리를 고의로 깨뜨린 것 같습니다. 완전히 감염이 된 실험체들이 덜 감염 된 실험체들을 물어뜯고 있습니다!”

 

팀장이 주먹을 세게 쥐고는 “대체, 옆에 있던 새끼들은 뭘 한 거야?!”하며 소리를 질렀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군인과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연구소 전체에 사이렌이 울렸다. 그리고는, 팀장과 군인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의 무전에서 똑같은 무전이 흘러나왔다.

 

“아아- 여기는 B-17. 지금 실험체들과 완전감염실험체들이 연구실 기계 폭발로 인해 생긴 틈을 이용해 외부로 탈출 하고 있다. 폭발음이 들리기 전, 이미 틈이 생긴 상황인 듯하다. 이미 300m 이상 도주한 실험체들이 있다. 모든 인력을 B-17로 보내주기를 바란다.”

 

 

석진에게 주사되었던 화학물질, 그 물질이 제조되는 연구실의 기계가 폭발했고 그 폭발로 인해 실험체들이 격리되어있던 공간에도 틈이 생겨 그 틈을 이용해 실험체들이 탈출했다는 무전이었다. 하지만 폭발보다 먼저 누군가가 실험체들에게 일부로 틈을 내어준 것이 분명했다. 팀장이 욕을 지껄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뒤로 우르르 모두 나가고, 실험실에는 석진 혼자 남겨졌다. 석진이 실험실에 들어왔을 때 본 사람처럼, 점점 몸에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눈도 감기기 시작하자 석진은 정신을 차려야한다며 눈을 간신히 떠보지만 정신은 갈수록 혼미해져갔고 이성의 끈을 놓치기 일부 직전이었다. 그렇게 혼자 실험실에 남겨진 시간이 길어지다, 누군가가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와 석진을 흔들어 깨웠다. 남준이었다. 남준이 묶인 손과 발을 풀고 옆에 있는 보관함들을 모두 뒤집어엎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어디 있지, 하는 말을 급하게 되뇌며 모든 서랍을 모두 열어본 남준이 결국 무언가를 찾아내고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정신 차려요, 눈 감으면 안돼요. 정신 똑바로 차려요.”

 

그대로 남준이 석진을 등에 업었다. 석진의 시야가 흔들리면서 도저히 무언가를 분간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남준이 모든 인력이 몰려간 B-17의 반대편으로 뛰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하고 밖으로 나왔다. 석진에게는 그저 흙과 자갈을 밟는 듯 한 소리만 들려왔다. 석진을 업고 뛰는 남준의 볼에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오랜만이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닌 세상의 순리대로 만들어진 것을 느끼는 것은. 그렇지만 남준은 그런 것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연구소에서 사람이 사는 곳 까지는 약 2km. 석진을 업은 남준의 달리기로는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남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감시망에서 벗어나야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압이 되면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고, 그 전에 마을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석진도 남준도 죽을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석진이 좀비로 완전히 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적어도 주사된 바이러스가 몸에 완전히 퍼지는 30분의 시간을 넘지 않아야한다. 석진에게 바이러스가 석진에게 주사된 지 이미 15분이 지난 상태였다. 석진이 남준에게 업힌 채로 계속해서 신음을 냈다. 그렇게 달린지 5분, 10분이 지나고 남준이 탈진에 가까운 상태로 지쳐갔다. 계속해서 신음을 내던 석진이 잠잠해졌다. 남준이 뛰면서도 석진을 계속 불렀다. 뛰는 남준에 제대로 업히지도 못한 채 흔들리는 듯 느껴지는 석진에 남준이 석진을 계속 불렀다.

 

“석진씨! 눈 떠봐요, 조금만 가면 되니까, 제발 조금만 버텨줘요!”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다 바이러스가 뇌까지 완전히 침투하게 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그 전에 막아야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때. 남준의 옆으로 차가 지나가 앞에서 세웠다. 윤기였다. 남준이 급한 대로 뒷 자석에 석진을 눕히고 자신도 차에 몸을 실었다.

 

“Yoon, 어떻게 된 거에요.”

“이대로라면 얼마 안가서 걸릴 거야. 어차피 이렇게 사는 거 진절머리 난 김에, 네가 살리고 싶어 하는 그 사람 살리는데 도움이나 줄까 하고.”

 

남준이 그런 윤기를 잠시 쳐다보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석진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남준이 몸부림을 치는 석진의 어깨를 잡아 제압했다. 석진이 발버둥을 치며 발을 힘껏 차기 시작했고 그 소리를 들은 윤기가 남준에게 소리쳤다.

 

“감염 된 거야?!”

“네, 이미 주사 된 것 같아요.”

“백신은?”

“챙겨왔어요!”

“뭐해, 빨리 주사 안하고! 골든타임 놓치면 백신도 소용없어!”

 

남준이 윤기의 말에 주머니에 있던 주사기 하나를 꺼냈다. “어디에 찔러요!” 남준이 의료진인 윤기에게 소리쳐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급하니까 아무데나 찔러!”였다. 남준이 계속해서 망설였다.

 

“오른쪽 허벅지 위에 찔러! 더 있다가 죽어!”

 

다급한 윤기의 말에 남준이 눈을 질끈 감고 석진의 허벅지 위에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석진이 몸부림치며 거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에 놀란 남준이 급한 대로 몸부림치는 석진을 제압했고, 석진이 힘껏 몸부림을 치다 점점 그 힘이 약해져 잠잠해졌다. 그리고, 통제바를 그대로 들이받아 마을로 들어온 윤기가 골목을 이리저리 맴돌다 차를 세우고, 남준에게 다급히 내리라고 했다. 윤기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였고, 아무도 없는 집에 익숙하게 번호키를 누르고 들어간 윤기가 석진을 침대에 눕히라고 말했다. 석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남준도 마찬가지였다. 석진이 숨을 거칠게 쉬었지만 정신을 못 차리고 눈을 뜨지 못하는 상태였다. 윤기가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더니, 뒤를 돌아 나갔다. 그 뒤를 남준이 따라갔다.

 

“Yoon, 어디가요. 지금 가면....”

“Jun. 말 못 한 게 하나 있어요.”

“......”

“바이러스, 내가 처음 만들었어요.”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책임져야 해요. Jun은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잖아요. 난 그런거 없어요, 그런데 나도 양심에 찔려서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더라고.”

 

윤기가 남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살아서 만날 수 있으면 만나자고요. 그땐 형이라고 불러요.”

 

 

 

 

 

 

 

“그때 죽었으면, 우리가 거기서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 바이러스를 이용해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했겠죠. 전 세계가 경악에 빠졌을 거고, 어떤 나라는 바이러스로 죽어갔겠죠.”

 

석진이 가만히 남준의 손을 쓰다듬었다.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후로 석진과 남준이 있었던 화학연구소에서의 일이 한 언론을 통해 조사되고 보도되며 전 세계로 밝혀졌다. 또, 미국의 국가차원 연구라는 것이 밝혀지며 전 세계적으로 질타를 받았고, 결국 선전포고까지 이루어진 전쟁은 치러지지 않았다. 석진과 남준은 연구소에서의 일을 조사하고 보도한 언론사에 직접 찾아가 더 많은 것들을 전했고, 그로인해 화학연구소는 완전히 철거가 되었다. 그리고 석진과 남준은 자신들의 고향인 대한민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사실 둘에게는 집 한 채 마련할 수도 없는 재산이 전부였지만, 이들이 대한민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둘에게 진실을 알리고, 그로서 전쟁을 막았다는 것을 전제로 보상금을 내어주었다. 놀랍게도 석진은 바이러스가 몸에 침투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힘들 정도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후에도 그때의 악몽에 시달렸다. 남준은 그런 석진의 곁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녔다. 이미 대한민국으로 넘어왔을 때부터 동거의 형태였고, 석진이 남준의 마음을 받아준 상태였지만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남준은 석진에게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물론 석진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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