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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꽃말

w. 속삭

/불은 타오르고, 물은 흘러내린다. 그 원시적이리만치 단순한 법칙이 속을 들쑤셨다. 존재를 흐리는 비를 맞으며, 석진은 제가 기꺼이 흘러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했다. 먼지인지 재인지 모를 것들이 끝없이 쏟아졌다. 거친 입자는 아무렇게나 뻗은 앞머리를 적셨다. 석진은 붉은 습진이 오른 손을 내려다 보았다. 힘을 가하자 엄지에서 뻗어나온 화염이 약지를 돌아 손목 아래로 번졌다. 눈 앞을 아롱대는 붉은 꽃망울들이 타닥 터져 오른다. 체온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온 몸을 태우고도 남을 화염을 품고도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유난히 찬 피부를 가진 석진은 제 몸 하나 데울 수 없는 불이 무슨 소용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걸레 짝이 된 담요가 철제 뼈대에 걸려 펄럭였다. 무너진 물류 창고의 잔해를 쓸자 고요히 불이 붙었다. 며칠동안 꽤 안전히 몸을 숨긴 곳이었으나, 오늘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을 땐 시체 투성이의 폐허로 번져있었다. 나무 판자가 아주 천천히 타들어가자 연기가 올랐다. 위치가 발각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제 처지가 갈고리에 꿰인 고깃덩이와 다를 게 뭔가 싶은 체념이 앞섰다. 세 개비뿐 남지 않은 담배를 문 석진은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였다. 필터 끝을 깊이 빨자 온 몸이 얇게 떨렸다. 석진의 불은 마치 물과 같이 고요했다. 붉음과 푸름,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 경계의 모순까지 모두 껴안은 채 평생을 살아온 석진이었다. 그에게 적은 괴생명체가 아닌 혐오어린 타인의 시선 정도였다. 불꽃이 느리게 날았다. 다시 밤이었다.

 

석진은 해가 뜨고 지는 것 만큼으나 자주 재앙을 목격했다. 전쟁에 나가 뚝뚝 넘어지는 게 통나무가 아닌 사람이란 사실을 마주할 때도, 폭주를 멈추지 못해 온 몸이 터져가는 동료를 볼 때도, 그로 인해 자살을 택한 가이드의 목을 밧줄에서 내릴 때도, 그들의 유품을 문질러 태울 때도 무너지는 것은 누군가의 세상이었다. 그런 사소한 재앙들은 그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했다. 겨우 일간지 한 켠에 실릴 정도였고, 석진은 가끔 지구를 죄다 태우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정말 망해버리다니. 온 세상이, 누구의 것이 덜, 또 더 망했는지 재는 게 무색할 정도로 무너지다니. 이틀 전이었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도망치다 도달한 곳은 낡은 백화점 옥상이었다. 칠이 여기저기 벗겨진 회전목마 한 대가 자꾸만 삐걱댔다. 스티커가 반쯤 떨어진 범퍼카는 황망한 곳에 우뚝 서있을 뿐이었다. 한때 고사리 손이 쥐여 있었을 노란 풍선이 잔뜩 쪼그라든 채 난간에 묶여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본 세상은 누군가 엉망으로 쓰러트린 젠가를 연상시켰다. 현실성이라곤 없는 세상의 끝을 내려다보며 석진은 버릇처럼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딱, 딱, 딱, 딱…. 그럴 때마다 라이터마냥 화염이 돋았다 죽었다를 반복했다. 딱, 딱, 딱, 딱. 마치 손짓 한 번에 모든 걸 멸망시키는 신이 된 기분. 건물 아래에서 날선 비명 소리가 솟아올랐다. 석진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온 몸이 붉게 터진 채 쓰러진 여자는 마지막까지 그 괴악한 생물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여자의 숨이 천천히 꺼져가자 석진은 둘러맸던 기타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낡은지퍼는 몇 번이고 천을 물었으나, 곧 활짝 열린 케이스 안에서 저격 소총을 빼들었다. 호와 M1500. 거친 철제가 아닌, 나뭇결이 유려히 뻗은 몸체의 소총이었다. 석진의 품에 딱 맞는 그것은 일본 경비부 특수부대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센터 관장이 석진의 생일 날 선물한 것이었다. 생일 선물로 소총이요? 멋들어진 주름을 구기며 웃은 중년 여성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관장직에 오른 인재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센터에서 나가면 평범한 사람인 척 무기도 쓰고 그래라.'라는 말로 능글을 떨었다. 별을 따다 주겠다는 것만큼이나 꿈 같은 말에 석진은 헛웃음을 쳤다. 센터를 떠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이 죽거나,

 

 

 

"현 시간부로 NSC는 귀하의 신체 및 능력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한다. 부디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길 바란다."

 

 

 

온 세상이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과거의 잔상을 밀어낸 석진은 바닥 위로 납작 엎드렸다. 노란 풍선이 자꾸만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뷰파인더에 오른 눈을 맞춘 석진은 안쪽 볼을 문 채 길게 내려온 옆머리를 넘겼다. 여자의 시체를 마구잡이로 찢어내는 생명체의 머리 위로 십자선을 맞춘 그는 곧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의 파형과 함께 생명체는 만신창이가 된 여자의 시체 위로 쓰러졌다. 다시 소총을 정리한 후 기타 케이스를 맨 석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층계참에 서서 귀를 귀울였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히 계단을 내려온 그는 이곳저곳에 튄 살점과 핏자국을 무시한 채 코를 틀어막았다. 3층 복도 끝에서 두 놈을 마주했으나, 화염으로 충분했다. 그는 백화점 정문을 통과해 대로로 나갔다. 뒤집힌 여자의 살가죽 위로 작은 초파리떼가 날았다. 괴생명체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짓이긴 후 시체를 걷어낸 석진은 여자의 등을 쓸어 작은 불을 붙였다. 총으로는 아주 죽지 않았을 것이다. 끈질긴 놈들이니까. 언제 깨어나 다시 여자를 엉망으로 만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익숙한 냄새가 실처럼 피어올랐다. 싸하고도 퀴퀴한 향이 축축한 옷깃에 옮겨 묻는다. 조각난 살과 장기로 어지러웠던 여자의 몸이 깨끗히 타내려갔다. 석진은 기타 케이스에 매달린 열쇠고리를 뜯어내 여자의 옆에 내려놓았다. 압화된 드라이 플라워였다. 동료들의 시체를 소각하는 것은 항상 석진의 일이었다. 세상이 끝났다고 해서, 오랜 버릇까지 끝나버린다면 자유를 누리기도 전에 죽어버리고 싶을 게 분명했다. 석진은 마지막 남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유의 맛이 꽤나 쓰다.

 

 

 

 

 

불의 꽃말

김남준 X 김석진

 

w. 속삭 (@sock_ing)

 

 

 

 

 

알 수 없는 괴생명체의 출현과 함께 카오스에 빠진 세계는 빠르게 마비되어 갔다. NSC, 국제 센티널 센터는 A급에서 SS급까지 영향력 있는 센티널들로만 구성된 군대 조직을 내세워 진압에 나섰으나, 오합지졸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능력의 종류부터 범위까지, 너무나 광범위한 이들이었다. 상위 센티널로 발현되었음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소수정예의 팀으로 움직였던 본래의 방식에서 벗어나자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시도때도 없이 일을 그르치는 센티널들에 비해 가이드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것 역시 문제였다. 갈등은 잦아졌고, 괴생명체는 인류 청소를 감행하려는 신의 사자마냥 사람들을 먹어치워갔다. NSC는 날선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리 등급이 높은 센티넬이라도 괴생명체를 완전 사살할 수 능력의 보유자들은 소수였다. 이를 테면 전자기력 같은 능력은 그들을 기절시키는 정도의 치명타로 그쳤다. 인간은 때로 괴생명체에게 머리를 뜯기는 것보다도 존재 이유의 상실에 더 괴로워했다. 센티널들의 가이딩 거부가 이어졌고, 일부는 폭주로, 일부는 물리적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센터 쓰레기 소각장에서는 시태 태우는 냄새가 그득했다. 마른 초원을 가로지르는 강가에는 관짝들이 차례로 놓였다. 인권 문제로 강한 비판을 받아왔던 NSC는 결국 센티널과 가이드들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기 이르렀고, 그들은 자유로 내몰렸다. SS등급인 석진의 화염은 산줄기 하나를 태우고도 남을 위력을 갖고 있었다. 센터 내에서 유일하게 석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가이딩의 자살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촐한 장례식 후 그는 거리로 나섰다. 제 가이드가 자주 치곤 하던 기타 케이스에 생일 선물 소총을 포장해서는. 동료들의 관이 놓여있는 초원 어귀에는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몇 송이를 꺾은 그는 햇빛에 바싹 마른 꽃잎을 압화해 케이스에 걸었다. 괴생명체에게 쫓길 때면 철제 고리가 자꾸만 짤랑댔다. 꽃의 소리가 날카로웠다. 저를 말려 죽여버린 이에 대한 분노일지도 모른다고, 석진은 생각했다.

 

"아씨, 축축해…."

 

이틀 째 멈추지 않는 비였다. 바지춤을 흥건히 적신 흙탕물에 체온이 점점 떨어져감을 느꼈다. 가이딩을 받지 않은지 오래였다. 능력을 쓰는 대신 소총으로 연명하려 노력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몸을 진득히 누르는 압박감에 자꾸만 발이 끌렸다. 안전하게 묵을 장소가 필요했다. 낡은 전파상에서 가져온 라디오에서는 괴생명체에 대한 설명이 줄을 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체형을 지녔으나 인간의 사고를 하지 않음. 흔히 대중매체로 각인된 좀비마냥 사람을 전염시키지 않음. 그저 그 자리에서 즉사시킴. 반사신경이 좋으며, 성인 남성의 것을 가뿐히 뛰어넘는 완력을 보유함. 시체를 조각내는 습성을 가지고 있음. 완전히 소각시키지 않는 이상 일반 총기는 물론 테이저 건 등으로도 사살이 불가함. 일시적으로 행동력을 마비시킬 수는 있음…. 골백 번도 더 들었던 방송에 다시금 귀를 기울인 석진은 옷가게였던 걸로 추정되는 건물에 몸을 숨겼다. 토막난 마네킹의 팔이 발치에 걸렸다. 멀쩡한 인간을 보지 못한 지 족히 보름, 아니 어쩌면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멈춘 시계가 괴생명체에게 물어뜯긴 시체마냥 맥을 못 추린 탓이었다. 천장에서 자꾸만 비가 샜다. 석진은 아릿한 정신을 붙잡고 외투를 벗어 머리 위로 올려 썼다. 소란스러운 꿈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게 꿈의 것이 아닌, 건물 뒷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아우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 후였다. 석진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기타 케이스를 등에 바짝 당겨 매고 귀를 귀울였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 괴생명체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생생한 욕지거리가 귓가에 박혀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씨발! 씨발 씨발 씨발, 뒤져! 제발 뒤져!"

 

자세를 낮춘 석진은 건물 뒷문을 나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또 태울 시체가 생기고 있는 거라면, 자유를 누리는데 큰 방해가 될 터였다. 소총을 꺼낸 석진은 벽에 등을 붙인 채 밖으로 고개를 빼들었다. 그는 곧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부벼야만 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검은 소총을 손에 꼭 그러쥔 또래의 남자 하나 였다. 그는 매우 빠르고 정확한 발음으로 속사포 같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악! 아 씨발 엄마! 제발 기절해라, 한 번만 기절해줘라! 아악! 너도, 너도 너랑 같이 다니는 친구 있을 거 아냐! 나도 잃어버린 친구 좀 찾자, 아악 씨발! 친구!"

 

남자는 개머리판으로 괴생명체의 머리를 있는대로 내려쳤다. 석진은 제 눈을 의심했다. 키에엑 하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괴생명체가 빠르게 의식을 잃고 있었단 사실은 둘째 치고…. 그에 맞먹는 저 힘은 무엇이며, 별 기술 없이 줘 패고만 있는데도 정확히 급소를 강타하는 실력하니, 괴생명체와 감정적 대화를 시도하려는 무모함. 거기다 총이 있는데 왜 쏘질 않고 몽둥이마냥 때리는 데 쓰는 것인가. 관전 포인트가 한 둘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친 석진은 장전한 총구를 괴생명체의 머리로 향했다. 십자선을 정수리에 맞추는데, 이런. 순간석진은 핑하니 도는 머리에 신음을 내뱉었고, 총알은 보기좋게 불발되었다. 거센 총성에 진득한 침을 흘리며 고개를 돌린 괴생명체는 타겟을 바꿔 석진의 쪽으로 발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석진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찬 콘크리트 벽을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습진이 찬 피부 껍질이 우스스 벗겨져 벌건 속을 보이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온 몸을 휘감자 참을 수 없는 열기에 손톱 하나하나마저 녹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폭주인가. 아릿한 정신 새로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빠르게 제 그림자 안으로 드는 괴생명체를 향해 그 어떤 공격의 태세도 취하지 못했다. 다섯 걸음 앞으로 다가온 괴생명체가 길고 검은 혀를 내뽑으며 괴성을 질러댔다. 소총을 짚으려 손을 더듬었지만 저격하기엔 틈도 없이 늦은 상태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유의 종말을. 입술을 꽉 문 석진은 팔을 뻗어 눈을 가렸다. 그때였다.

 

푸욱.

 

일말의 비명. 그리고 따라오는 인간의 것이 아닌 신음. 아직도 몸을 데우는 열기 속에서 석진은 실눈을 떠냈다. 발치에 진득히 고인 검은 체액에 신발이 끈적히 달라붙었다. 숨을 강하게 몰아쉰 석진은 흐물거리며 땅에 늘어진 괴생명체의 몸과 어정쩡하게 서있는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남자의 손에 들린 소총에는 장검이 장착된 채였다. 검 끝에서 검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손을 덜덜 떨더니 소총을 내던지고 석진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요? 몸에서 막 열기가…."

 

남자는 석진의 볼에 묻은 괴생명체의 체액을 닦아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 재앙에 내몰린 사람의 것이라 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둥글고 단정한 손톱이 더운 피부 위로 앉았다. 그때였다. 온 몸을 붉히던 열기가 물을 부은 것마냥 한 순간에 가라앉은 것은. 손바닥을 넘어 팔 언저리까지 뻗어난 습진이 빠르게 잦아들며 하얀 버즘을 피웠다. 호흡이 천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오른 팔을 휘감던 실선 같은 화염이 파삭 하고 사그라들었다. 남자의 더운 손이 석진의 볼을 천천히 훔쳤다. 꼼꼼히 닿는 손길에 둘의 온도가 섞여들었다. 석진은 복잡한 표정을 띄운 채 붉게 핏줄 터진 눈으로 남자의 움직임을 쫓았다. 얼굴 이곳저곳에 화상 흉터가 있는 남자는 큰 키와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꽤 유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길게 뻗은 눈꼬리는 매력적인 잿빛 동공을 감싸고 있었고, 넝마가 된 윈드브레이커 마저 태가 나는 남자였다. 남자가 손을 떼어 내려는 찰나, 석진은 홀린 듯 그의 팔을 천천히 끌었다. 자연히 두 팔을 제 볼 위로 올려놓은 석진은 그대로 손을 뻗어 남자의 뒷목을 끌었다. 먼지를 잔뜩 머금은 텁텁한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진다.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석진이 빠르게 속삭였다. 잠깐만, 미안해요. 잠깐만 집중해요. 폐허의 땅에서 맞붙은 입술은 재앙만큼이나 거칠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건물 벽을 짚어냈다. 알 수 없는 열기가 입술 끝을 데우자 목끝이 뜨거웠다. 그때였다. 둘의 뒤로 끔찍한 신음 소리가 이어진 것은. 석진은 깊게 감았던 눈을 떴다. 반쯤 덮인 눈꺼풀 속으로 까만 눈동자가 일순 반짝였다. 남준의 등 뒤로 쓰러졌던 괴생명체가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연히 뻗은 석진의 오른 손에서 붉은 화염이 솟았다. 불꽃은 그대로 괴생명체를 삼켜냈다. 그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 온도도 떨어질 줄 모르는, 불사의 화염이었다. 갑작스러운 열기에 입술을 떼어낸 남자가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석진의 손에 붙잡혀 다시금 입술이 맞물렸다. 미안해요, 이왕 아까 살린 거 한 번만 더 살립시다. 한 번만. 남자는 재앙의 얼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석진의 말간 피부를 눈으로 훑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괴생명체의 습격조차 막아낼 수 있겠다는 듯 온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체액으로 끈쩍한 소총을 내려놓은 남자, 아니 남준은 석진의 뒷목을 그러쥐었다. 멸망과 키스는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생각하며.

 

 

 

 

 

 

 

***

 

 

 

 

 

 

 

"소방관이요?"

 

"네."

 

 

 

남준이 제 주머니 속에서 작은 금속 배지를 꺼내 흔들었다. 이거, 나름 훈장도 받았었어요.

 

 

 

"근데 총을 못 다뤄요?"

 

"경찰이 아니라 소방관이라니까요. 사람 구하는 일 하는데 총 쏠 일이 뭐 있어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몽둥이마냥 줘 패는 사람이 어딨어요."

 

"정확히는 쓰기 무서웠던 거죠. 제가 손이 섬세하지 못해서요."

 

"그런 것 같더라."

 

 

 

석진은 나름 쇼파마냥 천을 둘러 놓은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제가 지내는 굴로 석진을 데려온 남준은 머쓱하게 머리를 털며 편히 있으라 덧붙였다. 반지하 집 아래로 틔운 단칸방이었다. 꽤나 그럴듯한 침대에 식량도 있었다. 남준이 마시겠냐며 물 한 병을 던지자 석진은 가볍게 그를 받아냈다. 혼자 지내요? 사연을 묻자 방 한 구석에 소총을 내려놓은 남준이 입을 열었다.

 

 

 

"동료들은 다 잃어버렸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살았더라도 아마 다들 죽었겠거니 생각하면서 지내겠죠. 그 편이 나으니까."

 

"…."

 

"놈들이 우리가 있던 소방 본부에 들이닥쳤어요. 저는 그때 신고 받고 출동한 상태였거든요. 좀비한테 사람이 뜯기고 있다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걸려온 전화가 뚝 끊기는 거예요. GPS 추적해서 출동했다가 대원 4분의 3이 죽었어요. 정말 말 그대로, 갈기갈기 뜯겨서."

 

 

 

석진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며칠 간 잘게 떨리던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된 것이 느껴졌다. 석진은 주먹 쥔 손을 천천히 펴냈다. 조용한 불이 보기 좋게 화륵 타올랐다. 고개를 든 그는 남준을 향해 물었다.

 

 

 

"센티널 가이드에 대해서 아는 건 있어요?"

 

"알다마다요. 그분들이 영웅 놀이 하고 나면 뒷처리하는 게 우리 몫이었는데요."

 

"그분들이라니. 왜 객관화 하지."

 

"…."

 

"남준 씨가 아까 나한테 한 거, 그거 가이딩이라니까. 그것도 상당한 등급의."

 

 

 

남준은 석진의 손가락 위로 깜빡대는 화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목 뒤를 문지른 그는 잠시 앓는 소리를 냈다.

 

 

 

"정확히는 제가 한 게 아니라 그쪽이 하게 만든 거죠."

 

 

 

남준은 천천히 물병을 따 입으로 가져갔다. 낯선 감촉이 감도는 기분에 서둘러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모든 센티널 가이드는 센터에 신고 및 등록을 해야 한다. 그거, 알고 있을 텐데. 왜 숨겼어요? 석진의 물음에도 남준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릇처럼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린 남준은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석진과 눈을 맞췄다. 희게 바랜 뒷머리가 목 뒤까지 길게 뻗어있었다. 매력적인 외형이라고 생각했다. 실없는 생각을 끊어낸 건 남준의 늦은 대답이었다.

 

 

 

"개뻥치지 말라고 할 수도 있는데,"

 

"…."

 

"저도 혼란스러워요. 이런 거 처음이라."

 

"설마 방금 발현됐단 뜻이에요?"

 

"아마, 그쪽들 표현을 빌리면 그렇게 되겠네요."

 

"그쪽들? 또 그런다. 객관화하지 말라니까."

 

"노력해볼게요."

 

"몇 살이에요?"

 

 

 

남준이 다시금 입을 다물자 마른 다리를 꼰 석진이 턱을 괴었다. 느리게 나는 먼지가 코를 간질인다. 석진의 생기 있게 달은 입술이 씰룩댔다. 씩 하고 오밀조밀한 미소가 걸리자 남준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냥, 편하게 소개팅 한다고 생각하고."

 

 

 

때 아닌 능글거림에 어이가 없어진 남준은 허 하고 웃어냈다.

 

 

 

"세상이 이렇게 망했는데요?"

 

"어디까지 망할 것 같아요?"

 

"멀쩡한 국가 공무원이 소개팅 놀이나 하자 할 만큼 미칠 때까지요."

 

 

 

간지럽게 웃은 석진은 벌떡 일어나 남준의 옆에 몸을 욱여 넣었다. 그가 풀석 앉자 무거운 먼지가 일었다. 아, 손님이란 게 올 줄 알았음 청소 좀 해놓을 걸. 흔한 빗자루 하나 없는 공간을 둘러보며 남준은 멋없는 생각을 이어갔다. 목을 가다듬은 석진이 연기 톤을 맞추더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김남준 씨. 키가 크시네요. 저는 멀쩡한 국가 공무원이고요, SS급 센티널이에요. 돈은 좀 있고요, 불도 좀 뿜을 줄 알긴 한데 정색하면 냉미남이에요. 또 내일 모레 서른인데…. 어릴 땐 추하게 늙기 싫으니까 서른 되기 전에 죽어야지 싶었거든요. 지금 세상 꼬라지가…. 이런 식으로 꿈이 이뤄질지 몰랐는데 어딘가 신이 있긴 있나 봐요."

 

 

 

석진은 자연스레 남준의 손을 맞잡고 휙휙 흔들었다. 악수라니. 그 흔한 반가움의 표시 하나가 이리도 낯설게 다가올 줄은. 남준은 악수를 끝내고도 제 손을 주물럭대는 석진을 향해 작게 말했다.

 

 

 

"가이딩 받으려는 거 알아요."

 

"알면 호의 좀 보여 봐요."

 

 

 

석진이 턱짓하자 크게 숨을 들이쉰 남준이 무릎을 접어 양반다리를 했다. 막상 말문이 트이자 비위 맞추는 게 어려울 것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웃긴 지경이었다.

 

 

 

"스물 일곱이요. 팔에 여기는 좀비한테 뜯긴 상처고, 얼굴에 여기는 예전에 일하다 입은 화상 자국. 불 뿜으시면 저랑은 상극이겠네요. 여길 다 태워서 이 생지옥을 끝낼 수 있는 불이라면 몰라도, 어정쩡하게 나서 진압해야 하는 거면 질색이에요."

 

"원해요?"

 

"뭘요?"

 

"다 태우는 거."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다르게 퍽 여유를 부리는 석진을 보며 남준은 고개를 기울였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짜고짜 설명을 차치하고 키스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맥락이란 게 없는 인물이다. 아니, 이미 비이성의 끝으로 치닫은 세상에서 맥락이 무슨 의미라고. 남준은 고개를 저었다. 거친 촉감이 맞닿자 시선이 내리 깔린다. 피부 껍질이 온통 벗겨진 석진의 손이 내려다 보았다. 손을 놓은 남준이 입을 열었다. 똑같은 물음이었다.

 

 

 

"원해요?"

 

"네?"

 

"아닐 것 같은데. 사실 무섭잖아요, 정말 다 태우게 될까 봐."

 

"…."

 

"말이 없네."

 

"방금 마음이 좀 타는 느낌이었어."

 

 

 

석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냈다. 센터에서 만났으면 훨 괜찮은 사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사족을 붙이자 남준이 눈썹을 으쓱였다.

 

 

 

"사실 나, 가이딩 받을 처지도 아니고. 센티널 등급이란 게 위험성이랑 비례하거든요. 이러다 능력이 한계치에 다르면 그냥 좀비 새끼들 몇 놈 끌어안고 폭주해 뒤지려고 했어요. 지금껏 본 적도 없을 정도의 불일 테니까, 열댓 놈은 족히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

 

"근데 뭐지, 이거. 더 살라는 건가. 이런 걸 내려주네."

 

 

 

석진이 남준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남준이 두 팔을 뒤로 길게 뻗어 몸을 받쳐냈다. 석진이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반말?"

 

"나보다 어리다며."

 

 

 

헛웃음을 친 남준이 습관적으로 튕기고 있던 석진의 손을 감쌌다. 작아도 분명 일정 온도 이상의 불에 피부가 벌겋게 데였으나, 곧 맥없이 꺼지고 말았다. 놀란 석진이 몸을 뒤로 당겼지만 남준이 빨랐다.

 

 

 

"진압 완료."

 

"…."

 

"더 살고 싶으면, 살면 돼요. 평생 처음 얻은 자유라면서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이딩은 가능했다. 그 효과인지 몰라도, 석진은 자꾸만 속이 간지러웠다. 남준이 시원한 입매를 뻗으며 웃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얼굴에도 빛이 든다.

 

 

 

"질서도 법칙도 없는 세상이 왔잖아요. 이렇게 자유 친화적일 수 있나."

 

"…."

 

"살려 드릴게요. 평생 해온 게 남 살리는 일인데요, 뭐."

 

 

 

직업병이라고 생각하고. 말이 끝에 다르자 석진은 꿈 같은 팔을 뻗어냈다. 소상히 달아오른 볼을 끌어 다시 입을 맞추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어할 수도 없는 불을 품고 살면서 단 하나, 마음껏 태워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아마 마음 쯤 될 거라고, 석진은 생각했다. 복잡한 기억들이 머리를 달구는 듯 했으나, 곧 하얀 파도가 밀어들어 모든 것을 쓸어간다. 남준의 팔이 어깨 위로 얹혔다. 참을 수 없는 시원함이었다.

 

 

 

 

 

****

 

 

 

 

 

남준의 초소에서 생활하게 된 둘은 천천히 폐허 속에서 삶을 일궈 나갔다. 신세만 질 수 없지 않냐며 석진은 매일 남준에게 소총 조작법을 가르쳐 주었다. 남준은 이전에 보았던 대로 쓸데없이 센 악력과 투박한 손놀림의 소유자였다. 머리가 좋아 금세 개념을 이해했으나, 몸으로 잘 표출되지 않는 듯 했다. 실전에 약한 타입이라니. 답답함에 발을 쾅쾅 구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연습 타겟은 물론 괴생명체들이었고, 밤만 되면 그들의 소굴로 변한다는 사거리까지 스스로를 내몬 둘은 연습을 이어갔다. 도시에서 제일 큰 사거리에서는 총성과 신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녹아내릴 듯 쓰러지는 괴생명체가 도로를 그득 매웠다. 여차 일이 잘못되어 말도 안 되게 쫓기는 날도 있었지만, 미친듯이 달리는 와중에도 헛헛한 웃음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아, 형! 언제 죽여줄 거예요, 쟤! 쫓기던 남준이 소리치면 가로등 위에 발을 대롱대며 앉은 석진이 낄낄 웃곤 했다. 야, 총 쏠 때 폼 나려면 체력이 짱짱해야지. 세 바퀴만 더 뛰어! 죽겠다며 타임을 외칠 때가 되어서야 석진은 소총으로 깔끔히 괴생명체의 머리를 맞췄다. 기절시킨 후엔 직접 접촉해 불을 질러 사살했다. 기분 나쁜 진득함에 이마를 찌푸리다가도 인근 어딘가에 숨어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을 생각하면 그만 둘 수 없었다. 괴생명체의 사체를 길 가쪽으로 던져넣은 석진은 손을 탁탁 털었다. 남준은 토기가 오르지도 않는지 괴생명체의 몸에 박힌 총탄을 꼭 다시 꺼내 챙기는 꼼꼼함까지 보였다.

 

 

 

"야, 걍 버려! 당장 쓸 거 하나도 없냐?"

 

"전에 버려진 군부대에서 좀 쌔벼온 거 있긴 한데요."

 

"나이스, 그럴 줄 알고 한 소리야."

 

 

 

석진은 총탄으로 가득 찬 나무 상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매일 소총을 닦아냈다. 선갈색 나뭇결이 희미한 전구불을 받아 일순 반짝였다. 생존만이 목표인 일상에 여타 할 일은 없었다. 가이딩은 능력을 사용했을 시 자기전 딱 삼십 분,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약속했다. 괜히 몸정 들면 곤란하지 않겠니? 석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남준이 말했다.

 

 

 

"하긴, 그렇죠."

 

"너 말하는 거야, 너."

 

"엥?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형 나 보자마자 키스했잖아요."

 

"그건 생존 본능이었고."

 

 

 

그럼 얌전히 손을 붙잡고 있던 석진은 그럼 한 번 확인해보겠냐는 말과 함께 얼굴을 쑥 들이밀며 가슴께를 지분댔다. 일순간 얼굴을 화악 붉힌 남준이 어버버 대며 손을 떼어내면 그제야 보라는 듯 몸을 물렸다.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이 얄미워 참을 수 없었다. 남준은 아마 평생 말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저격 직전의 석진의 모습을 꽤 좋아하게 됐다고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이 전쟁통 속에서도 자존심만은 죽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얌전히 흘러내린 옆머리를 자꾸만 뒤로 넘기는 모양새며, 폐허의 먼지를 머금고도 올곧게 타겟을 향하는 동공, 생기를 머금고 입 안쪽을 무는 입술과 깨끗하게 솟은 이마까지. 답지않게 차분해진 석진은 저격 직전이면 꼭 숨을 참아냈다. 일말의 떨림도 없이 깨끗히 타겟을 처리하고 나면 손을 탈탈 털며 일어나 "자, 밥 먹으러 가자!" 따위의 말로 매듭을 짓는 것이다. 좀처럼 늘 생각을 않는 저격 실력과 달리 남준은 웃음이 늘어갔다. 가이딩이 필요 없는 날이면 몸을 옹송그리고 엎드린 석진의 앞에 한참을 앉아있기도 했다. 잠에 취한 몸이 일정히 오르내릴 때마다 파슥 하고 불꽃이 일었다. 남준은 손을 뻗어 눈을 찌르는 앞머리와 이마를 쓸었고, 불꽃은 다시금 사그라들곤 했다.

 

어느 날, 식량을 찾는다고 나갔다 돌아온 남준의 손에는 큰 궤짝이 들려 있었다.

 

 

 

"그거 뭐야?"

 

"형이 노래 부르던 거요."

 

"내가 노래를 불렀어? 그런데 뻔뻔하게 관람료를 안 냈단 말이야?"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얹힌 궤짝 안에는 요란한 소리가 무색하게 꽤 단촐한 것 뿐이었다. 그중 석진의 눈을 사로 잡은 건 단연,

 

 

 

"헐, 술!"

 

 

 

그득히 찰랑히는 맑은 술이었다.

 

도시 외곽에서 인적이 없는 지하 물류 창고에 도달한 남준은 이미 텅텅 비어있는 선반들을 훑다 술 몇 병을 발견했다. 큰 임무가 끝나면 꼭 동료들과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다는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늘어놓던 석진이었다. 남준의 예상대로 술 몇 병에 신이 난 석진은 금 간 머그컵을 가져와 옷 소매로 안을 대충 닦아냈다. 안주는 이 세계에 내린 재앙이면 충분했다. 제대로 된 잔 하나 없이 술을 나눈 둘은 금세 오른 취기에 매트리스에 발을 뻗고 나란히 누웠다. 천장이 위로 훅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석진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헐렁한 웃음을 내뱉었고, 그럴 때마다 요상한 모양의 화염이 뻗어나왔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또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온 방이 타들어갈 걸 염려한 남준이 그의 손을 쥐었다. 그만 해요, 그만. 기분 좋은 감각에 석진이 볼을 부볐다. 또 다시 대책없이 시원해지는 기분. 석진은 푸르르 입술을 떨었다. 알코올 내가 진동하는 골방에서 둘은 자꾸만 더운 볼을 쓸었다. 황망히 지직거리던 라디오에 주파수가 맞았는지, 깨끗한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울에 계신 생존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Z동 제일타워 안쪽 지하 벙커에 베이스 캠프를 마련했으니 식량 조달이 필요하신 분들께서는 속히….

 

 

 

"형."

 

"엉."

 

"식량이랑 물이 부족해요. 우리 슬슬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으응, 어디로…."

 

"어디든지요, 살 수 있는 곳으로. 지금으로선 아마 베이스 캠프."

 

 

 

하아 하고 더운 숨을 뱉어낸 석진이 천장으로 손을 뻗어냈다. 주먹을 쥐자 화염이 오른팔을 휘감았다.

 

 

 

"그거, 우리 엄마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인데에…."

 

"뭐가요?"

 

"떠나야 된다는 거."

 

 

 

남준은 잠자코 석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취기 오른 이마를 짚자 석진이 남준의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우리 엄마 진짜 말도 안 되게 잘생겼었거든? 근데 문제는 얼굴값을 쫌 한다는 거였어. 사실, 쫌이 아니라 존나 많이. 내가 10살도 안됐을 때 센티널로 발현됐고 알자마자 덜컥 센터에 팔아넘기는 거야. 우리 이제 떠나야 돼, 김석진. 이러면서…."

 

"형만 떠난 꼴이었네요."

 

"아냐, 같이 떠나긴 했어. 다만 엄마는 세상을 영영 떠났고…."

 

 

 

남준이 석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꼭 맞잡은 석진은 눈을 감은 채 달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지 몰랐어. 죽고 싶단 의지만으로 죽더라…."

 

"…."

 

"센터에서 다른 놈들은 가족 면회 받는다고 신나서 꽁지 빼는데, 난 그럴 때마다 혼자 방에서 이거랑 놀았어."

 

 

 

발 끝으로 톡 차자 데구르르 굴러간 술병이 매트리스에 닿았다. 남준은 홀로 술잔을 기울였을 석진을 떠올렸다.

 

 

 

"아빠는 군인이었는데, 진작 이스라엘에 파병 나갔다 돌아가셨거든. 일어나보니까 갑자기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다는데, 하나도 위기감이 안 드는 거야.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지 들지. 절대로, 세상이 두쪽나도 죽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을 사람들이 남아 있어야지…. 내 능력,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일 텐데."

 

"…."

 

"뭐 말 좀 해 봐."

 

 

 

갑작스레 눈을 뜬 석진과 시선이 맞닿자 남준은 다시 고개를 돌려냈다. 천장에서 자꾸만 알 수 없는 잔해가 우스스 떨어져내렸다. 알 수 없는 삐걱임에 속이 울린다. 머리를 벅벅 긁어낸 남준이 복잡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고해성사 시간이면 하나 풀 거 있긴 한데요."

 

"응."

 

"내가 마지막으로 출동했던, 그 좀비한테 사람들이 뜯어 먹히고 있으니까 와달라고 했다던 전화요. 그 뜯어 먹히고 있던 사람들에…. 우리 엄마랑 동생도 있었거든요. 그날 동생 생일이었고, 둘이 선물 골라보겠다고 백화점에 갔댔어요. 알아요? 옥상에 낡은 회전목마랑 범퍼카랑, 그런 거 잔뜩 있는 일본식 백화점. 여기서 안 먼데."

 

 

 

석진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모를 리 없지. 낮은 음성이 마른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눈 감은 남준을 내려다본 그는 계속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장례식을 치를 수가 있어야죠. 갈갈이 찢겨서는, 남은 게 없었어요. 난 사람 몸 안에 그렇게 복잡한 게 들어차 있는 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가족이 만신창이가 된 걸 보는데, 그딴 생각 밖에 안 드는 거예요. 현실성이 없어서."

 

"…."

 

"아, 제발 망했으면 하는 말을 평생 달고 살았는데…."

 

"응."

 

"진짜 망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밤새 아슬히 매달려 삐걱이는 전구의 소음, 섬뜩한 신음 소리, 괴생명체가 일으키는 소란 뿐, 밤은 여전히 밤이라는 듯 고요했다. 석진은 앉은 몸을 숙여 남준의 입술에 제 것을 포개냈다. 슬쩍 벌린 입술 새로 서로의 숨이 밀려 들어왔다. 덥고 텁텁한 숨이었다. 단 일말의 단맛도 서려있지 않은, 재앙을 닮은 맞닿음. 남준은 작게 눈을 떠 취기에 볼이 발개진 석진을 올려다 보았다. 볼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감촉에 숨이 허덕였다. 석진이 울고 있었다. 눈물의 온도 만큼은 불의 사람답지 않게 지나치게 차고 또 찼다.

 

 

 

 

 

***

 

 

 

 

 

다음 날, 둘은 필요한 것들을 챙겨 지하 굴을 나섰다. 미련이 남았다는 듯 방을 둘러보는 남준의 어깨에 석진이 제 기타케이스를 둘러 주었다. 가자, 떠날 시간이야. 손을 끄는 석진의 움직임에 남준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떠날 시간이었다.

 

석진이 총을 쥐고, 남준은 뒤를 따랐다. 베이스 캠프까지의 길이 꽤나 험했다. 이리저리 모서리가 떨어진 지도를 펴든 남준이 방향을 지시했다. 활동성이 줄어든다는 낮임에도 살과 피에 굶주린 괴생명체들은 인간의 문명을 차례로 좀먹어갔다. 잰걸음으로 도시를 차례차례 횡단한 둘은 괴생명체 세 마리가 발을 질질 끌고 걸어가는 골목 앞에 멈춰섰다. 야, 너 여기 있어. 처리하면 부를게. 성인 남자 둘이 들어가기엔 비좁은 골목에 석진은 남준을 저지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몇 발 물러나 석진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담벼락에 어깨를 기댔다. 그때였다. 심상치 않은 소음에 남준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멀리, 약국으로 보이는 듯한 건물에서 귀를 때리는 울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괴악하게 몸을 뒤트는 괴생명체의 입 끝에 마른 다리가 물려있었다. 남준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제 반절은 될까 싶은 어린 여자 아이였다. 아이의 운동화가 형편없이 물어뜯긴 채 괴생명체의 발치를 굴렀다. 절로 소총으로 손을 뻗었으나, 제 조악한 실력으로는 아이까지 위험하게 만들 거란 판단이 앞섰다. 거세게 물린 아랫입술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남준은 총을 쥐어진 채 빠르게 뛰었다. 멀리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석진의 것이 분명했다. 석진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개머리판을 꼭 그러쥔 채 괴생명체를 내리 친 남준은 그가 아이의 발을 놓는 틈을 타 다시 한 번 가격했다. 아이가 숨이 넘어갈 듯 울며 뒷걸음질을 쳤다. 물린 오른 발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얼른 들어가요! 최대한 안쪽으로!"

 

 

 

남준은 재빠르게 소리쳤다. 괴생명체가 말도 안되는 신음을 내지르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몇 번 더 공격을 가한 후 총으로 쏴 기절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몸을 피하라 외쳐도 패닉에 빠진 탓에 그 자리에서 덜덜 떨고 있는 아이가 문제였다. 이 대로라면 싸움에 말릴 게 분명했다. 남준은 온 힘을 다해 괴생명체의 머리에 타격을 가했다. 반사신경이 심상치 않은 그것은 진득한 체액을 내뿜으며 잔뜩 성난 입에서 오물을 토해냈다. 공격력을 잃은 괴생명체가 비틀대며 담벼락에 부딪혔다. 때를 틈타 빠르게 몸을 돌린 남준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발에서 흘러나온 피가 온 옷을 검붉게 적신다. 그때였다.

 

 

 

"아악!"

 

 

 

귀를 가르는 비명이 이어졌다. 아이가 온 몸을 덜덜 떨며 남준의 팔을 가리켰다.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찢길 듯한 고통보다도 더 괴로운 소리였다. 숨이 금방이라도 끊길 듯 조여왔다. 팔 언저리에서 참을 수 없는 열기가 느껴진 탓에 눈을 꼭 감아냈다. 남준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 내 괴생명체를 밀어냈다. 아이는 버둥거리며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남준은 작은 머리를 껴안고 입술을 묻었다. 괜찮아, 눈 감아. 못 본 거야, 이건 그냥 나쁜 꿈이야. 빠르게 말을 내뱉은 남준은 아이를 약국 안으로 들였다. 바닥에 그를 내려놓은 남준이 소총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괴생명체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 팔을 들었으나, 왼손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진득한 피가 발치를 적셨다. 자꾸만 시야가 흐려졌다. 괴생명체의 조악한 몸뚱이가 두 개, 아니 세 개의 잔상으로 아른댔다. 그때였다.

 

 

 

"김남준!"

 

"…."

 

"김남준! 정신 차려! 죽지 마, 정신 차려!"

 

 

 

화륵 소리와 함께 엄청난 화염이 날아들었다. 찬 몸을 데우는 지옥 불과 같았다. 세된 비명이 따라왔다. 제 이름을 끊어질 듯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로 날아든다. 남준은 제가 목격하는 것이 진정 세상의 끝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지옥이 있다면 흡사 이런 느낌일까. 그 어떤 파도에도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불이 거세게 번졌다. 남준은 비틀대는 걸음을 저지하지 못한 채 바닥 위로 쓰러져내렸다. 괴로움에 몸부림 치며 천천히 타들어가는 괴생명체 역시 힘없이 고꾸라졌다. 키에엑. 키릭. 키릭. 끔찍한 소음이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의 소음에 덮여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남준은 흐려져가는 의식을 애써 붙잡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이만 편해지고 싶단 생각 뿐이었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목이 터져라 우는 아이를 품에 가득 안았다. 그저 그대로,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멸망의 불꽃을 향해 시선을 뻗을 뿐이었다.

 

 

 

"개새끼야! 니가 살아야 남도 살릴 거 아니야!"

 

 

 

그게 남준이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었다.

 

 

 

 

 

***

 

 

 

 

 

눈을 떴을 때, 남준은 필히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감촉에 온 몸을 더듬었다. 깨끗한 시트, 싸한 알콜 향, 조용한 발소리, 밝은 등까지. 몸을 일으키자 오른팔에서 끊어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남준은 제 의지에 반해 다시금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오른 팔엔 깨끗한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피가 배어나왔는지 끝이 붉으스름했다. 천천히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이마를 짚어낸 남준은 실눈을 올려 떴다. 완전히 뜯긴 줄 알았던 팔이, 용케도 붙어있다. 기적이 이리도 흔한 것이었던가.

 

 

 

"어, 깨어나셨네요?"

 

"…."

 

"여기 베이스 캠프예요, 서울 생존자들을 위한. 제일타워 지하 벙커. 생존자라고 해봤자 몇 남지도 않았지만요."

 

 

 

남준의 시야로 파란 셔츠 소매를 올려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쏙 패인 보조개를 보이며 경계 없이 다가온 그는 선반에서 붕대 뭉치를 꺼내더니 간의 의자에 앉았다. 낯선 얼굴임에도 묘하게 편안함을 주는 표정이었다.

 

 

 

"어디까지 기억 나세요?"

 

"아마, 다요…."

 

"덕분에 여자 애는 살았어요. 옆 방에 누워서 자고 있고요."

 

"여자 애요?"

 

"네, 구하셨잖아요. 그 증거로, 저거."

 

 

 

남자가 얇은 손을 뻗어 남준의 오른 팔을 가리켰다. 다시금 웃은 그가 저를 정호석이라 소개했다.

 

 

 

"멸망 전엔 그냥 의대생이었는데, 용케 안 죽고 살아서 의사 노릇 좀 하고 있어요. 실력 괜찮죠?"

 

"저 어떻게 여기까지…."

 

"아, 요 근래 생존자 구조에 열심히거든요. 소리를 듣고 주변 수색하던 우리 대원 몇 명이 데리고 왔어요. 보기보다 무모하신 것 같아요. SS급 센티널이랑 같이 다니시고."

 

 

 

남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아, 씹…. 밀려드는 고통에 욕을 씹어 보아도 이미 늦은 터였다. 호석은 제 팔이 잘리기라도 했다는 듯 얼굴을 구겨냈다. 남다른 공감 능력의 소유자임이 분명했다. 남준은 고통을 문 채 급히 물었다.

 

 

 

"그, 그 형은요? 저랑 같이 있던 센티널이요."

 

"따로 격리해뒀어요. 억울하실 건 알지만, SS급인 걸 알고 도저히 다른 분들하고 같이 있게는 못 두겠더라고요."

 

"제어 잘 해요, 그 사람."

 

"의지의 문제가 아니에요. 센티널의 능력은 양날의 검 같아서 언제 등을 돌려서 자신까지 공격할 지 모르는 거라고요. 거기다 몸이 한계던데요. 저 대학 때 이쪽 전공이었거든요, 믿으셔도 돼요. NSC가 군대를 철수시켰단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높은 등급의 센티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네요."

 

 

 

호석이 손을 뻗자 남준은 순순히 오른 팔을 내밀었다. 끔찍히 떨어져나간 환부에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면서도 젖은 붕대를 푸는 손길이 꼼꼼했다. 남준이 말을 이었다.

 

 

 

"이거 끝나면 만나게 해주세요. 만나야 돼요, 능력 많이 썼을 거니까."

 

 

 

어깨를 으쓱인 호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와 함께였다.

 

 

 

밖으로 나선 남준은 잿빛 복도를 따라 석진이 있다는 방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방 가운데에 우뚝 선 석진이 보였다. 제 오른 손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 그는 한 순간 무서운 열기를 뿜으며 타오른 불에 눈을 깜빡였다. 불은 다시금 타올랐다. 놀란 남준이 뛰어가 뒤에서 석진을 안았다. 왼팔로만 어정쩡하게 끌어안은 꼴이었지만, 석진은 금세 남준임을 알아차렸다.

 

 

 

"형, 왜 그래요 진짜. 사람 놀라게."

 

"안 죽었냐?"

 

"아쉬워요?"

 

"근데 지금 뭐해, 너."

 

 

 

남준이 석진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웅얼대는 소리가 먹혀든다.

 

 

 

"가이딩이요."

 

"…."

 

"좀 시원해요?"

 

 

 

석진의 몸에서 작은 스파크가 올랐지만 개의치 않은 남준은 그를 더욱 깊게 안아냈다. 잘게 떨리는 몸체가 그대로 와닿았다.

 

 

 

"왜 이렇게 몸을 떨어요."

 

"너 끌고 온다고 능력 하도 썼더니 그런다, 왜."

 

"오늘은 키스로도 안 되려나."

 

 

 

남준은 그를 천천히 돌려 세웠다. 얼굴에 그새 못보던 생채기들이 가득했다. 피가 새어나오는 오른 볼의 상처를 엄지로 훑은 남준이 석진의 이마에 입을 맞춰냈다. 석진이 다시금 몸을 떨었다. 맞잡은 손 새로 몇겹은 더 더운 온도가 느껴졌다. 부스러진 피부 껍질이 우스스 떨어진다. 애써 무연한 표정을 띄운 남준이 물었다.

 

 

 

"총은요?"

 

"기부했어. 네 것까지 다. 여기 사람들 완전 오합지졸이야."

 

"NSC도 그래서 망했잖아요. 인간이 멸망보다 작아서 그래요."

 

"멸망이 클까, 우주가 클까?"

 

 

 

작게 웃은 남준이 쓰러지듯 석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하여튼 맥락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몸을 뒤튼 괴생명체의 사체도, 눈 감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람들도, 바람의 온도도. 그 모든 것 하나 그대로인 것 없는 재앙 속에서 석진만은 끈질기게 여전했다.

 

 

 

"살아 나가서 달나라 여행이라도 가보면 알겠죠."

 

 

 

둘은 깊게 입을 맞추었다. 아직 죽지 못한 지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고 있었다. 긴 입맞춤 끝에 눈을 뜬 석진이 남준의 볼을 붙잡았다. 곧 팔꿈치 언저리에서 화륵 하고 불이 인 탓에 놀라 손을 거두었지만, 남준만큼은 그의 손등을 겹쳐 잡았다. 둘뿐이었던 지하 굴에서의 삶이 실타래마냥 스쳐갔다. 귓가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또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어질해진 머리에 잠시 고개를 비튼 남준에 석진이 눈을 맞추었다. 지금만큼은 그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야, 남준아."

 

"네, 형."

 

"우리 살아 나갈 이유 만들자."

 

"달나라 여행으로 부족해요?"

 

"좀 더 현실적인 걸로."

 

"좀비 떼가 나와서 세상이 멸망했다 같은 것보다 더?"

 

"응."

 

 

 

남준은 눈을 접으며 싱긋 웃었다. 깊이 타오르는 화염마저 잠재울, 파도의 웃음이었다.

 

 

 

"연애는 어때요."

 

"…."

 

"백화점 옥상 회전목마라도 타려면, 적어도 데이트 같은 거 하려면 살아 나가야죠."

 

 

 

석진이 맞닿은 이마를 가볍게 비벼냈다. 어느 새 충분해진 멸망 속 제 삶이, 지나치게 낯선 탓이었다.

 

 

 

 

 

***

 

 

 

 

 

다음 날, 간만의 단잠에서 눈을 뜬 남준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역시 석진이었다. 낯선 벙커의 잿빛 천장이 이상하게 속을 들쑤시는 아침이었다. 뻐근한 몸을 돌린 남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이어 육중한 철제 문이 열렸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미소를 건 호석이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상처를 돌보기 위해 찾아온 그는 앉자마자 남준의 오른팔을 살폈다.

 

 

 

"좀 어때요. 괜찮아요?"

 

"저랑 같이 온 형은요?"

 

"환자면 환자답게 좀 굴어요. 어디 불편한데 있어요?"

 

 

 

핀잔을 준 호석의 말에 남준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호석은 물과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남준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거의 뜯겨나간 팔을 붙여놓은 거라서요. 상처 재생엔 잘 먹는 수밖에 없어요."

 

"형은요? 밥 먹었대요?"

 

"센티널 분 말씀하시는 거면, 아침 일찍 지상으로 나가셨어요."

 

 

 

의외의 말에 남준이 눈을 크게 떴다. 득달같이 달려는 왜냐는 물음에 호석이 손바닥을 쫙 펴 얼굴을 막았다.

 

 

 

"말씀 못 들으셨어요? 우리 쪽 정찰 팀에 협력해주시기로 했어요. 능력은 보장 되는 분이시잖아요."

 

"그래도 나한테 말도 없이…."

 

"한계에 다른 몸인데, 남준 씨한테 티내고 싶지 않으셨겠죠."

 

 

 

무슨 뜻이냐는 듯 호석을 돌아보는 시선이 꽤나 의아했다. 한계라니, 분명 제가 잠들기 전까지 열과 성을 다해 가이딩 했는데. 그럴 리 없다며 남준이 고개를 저었다. 호석은 물병을 따 내밀며 말을 이었다.

 

 

 

"모르셨어요? 그 분 많이 힘드실 거예요. 능력이 한계치를 벗어났어요."

 

"제가 매일 가이딩 했는데도요? 신체 접촉만으로는 별 소용이 없는 건가요?"

 

 

 

남준의 말에 호석이 붕대를 정리하던 손을 멈춰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준과 눈을 맞췄다. 한 눈에 봐도 이루어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한참 아무 말 않던 호석은 다시금 되물었다. 똑같이 돌아오는 물음에 제 귀가 잘못되지 않음을 안 호석이 침대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남준 씨가 가이딩 했다고요? 어떻게요?"

 

"네? 그야 제가 신체 접촉을 했으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예?"

 

"그렇잖아요. 남준 씨는 그냥 저 같은 일반인인데, 어떻게 가이딩을 해요."

 

 

 

남준의 두 눈이 느리게 껌뻑였다. 종잡을 수 없는 말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뭐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분명 두 달 전쯤에, 그러니까 형을 처음 만났을 때 발현이 됐었어요. 저랑 접촉을 하면 체온도 안정됐었고, 작은 불꽃들은 금방 사그라들었다고요."

 

"발현할 때 가슴 쪽에서 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셨어요?"

 

"…."

 

 

 

호석이 간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퍽 진지한 눈을 올려뜬 그가 고개를 손을 빼들며 말을 이었다.

 

 

 

"가이드 발현은 보통 엄청난 고통을 수반해요. 삼 일은 꼬박 병상에 누워있어야 할 만큼 발열이 심하고요. 물론 아무 증상 없이 발현되는 경우도 간혹 있긴 한데…. 만약 그런 케이스였다면 제가 진작 알았겠죠, 남준 씨 치료하면서. 센티널보다 더 드문 게 가이드인데."

 

"무슨 그런…."

 

 

 

남준의 눈이 혼란스러운 듯 일렁였다. 그럼 그건 다 뭐란 말인가. 내가 달랬던 체온과, 시도때도 없이 팔을 휘감던 불의 조각들, 열기가 올라 붉게 달았던 입술 같은 것. 옥상에 잔뜩 엎드린 채 흔들림 없이 방아쇠를 당기던 석진이 떠올랐다. 남준의 손이 허공에서 황망히 덜걱댔다. 잠시 그와 시선을 맞춘 호석은 갑작스레 숨을 헉 들이켰다. 그는 곧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 설마…."

 

"…."

 

"설마 진짜…."

 

 

 

환상 치료? 알 수 없는 호석의 말에 남준이 설명을 종용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눈썹을 단정히 덮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환상통이라고 알아요? 극도의 통증을 느꼈던 부위나 절단되어 없어진 부위에서까지 통증을 느끼는 현상이에요. 일종의 심리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거죠. 환상 치료는 반대 개념이에요.센티널에게 간혹 나타나는 정신적 해리의 일종이죠. 가이드가 아닌 이한테 극도의 애착감을 느껴 가이딩을 받고 있다 여기는 거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어디…."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체온에 닿지 못한 격리 센티널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만약 이게 진짜라면…. 생존자와 접촉하지 못해 오래 혼자 도시를 떠돈 결과겠죠. 그러다 남준 씨를 만난 거고요. 남다른 애착 관계도 형성된 게 눈에 보이고."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알 수 없는 마찰음이 머리를 울렸다. 남준은 제 귀로 흘러들어오는 말들을 조각조각 잘라 몇 번이고 붙여보았으나 아무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호석의 음성이 물 속에 잠긴 것마냥 웅웅댔다. 입술을 축인 물에도 마른 기침이 터져나온다.

 

 

 

"그런데 아마 나중엔 깨달으셨을 거예요. 실제로는 진정되지 않는 몸을 보면서…. 점점 알아채셨을 텐데. 모를 리가 없는데…."

 

"…."

 

"몸이 점점 폭주에 달해간다는 거…."

 

 

 

남준은 빠르게 담요를 걷어냈다. 신발을 구겨신을 틈도 없이 벙커 철문을 뜯어낼 듯 연 그는 빠르게 방을 나섰다. 저를 바쁘게 부르는 호석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오른팔이 심장 고동마냥 욱신댔다. 복도를 내달리는 그에게 저도 모르게 길을 내어준 사람들은 놀란 눈을 올려떴다. 정찰대원 몇 명이 남준을 붙잡으려 했으나, 괴생명체도 때려 눕힐 정도의 완력에 맞설 순 없는 일이었다. 남준은 제 볼을 아릿하게 데우는 눈물의 온도를 기억했다. 환상의 온도. 그 모든 게 다 저 너머의 것이었다니. 멸망과 환상이라니, 너무 안 어울리잖아. 그는 축축한 감각에 손등으로 눈을 비벼냈다. 진짜 눈물이었다. 꼭 석진의 불을 닮은, 아릴 듯 타오르는 눈물이었다. 도시 속에서 남준을 향해 손을 뻗었던 석진처럼, 남준은 이 마음의 폐허를 안은 채 못다할 만큼 석진이 고픔을 느꼈다.

 

나선형 계단을 단숨에 올라간 남준은 굳건히 버티고 서있던 지하벙커의 문을 열어냈다. 한 순간의 더운 바람이 훅 끼쳐왔다. 두꺼운 철문이 열리자 황망하게 짝이 없는 폐허가 눈 앞에 펼쳐졌다. 오른팔을 꽉 쥔 남준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바닥에 거친 생채기가 돋았다. 그럼에도 남준은 달렸다. 총 하나 매지 않은 맨몸으로, 괴생명체의 울음을 피해가며 코너를 돌고 또 돌았다. 그때였다. 먼 곳에서 선홍빛의 섬광이 한 순간 껌뻑였다. 남준은 그곳을 향해 숨이 턱 끝까지 오르도록 뛰었다. 거센 비명들이 가까워졌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오른팔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올라옴을 느꼈다. 비틀대는 걸음을 애써 곧추세운 남준은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으로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이리저리 달아나는 정찰대원들이 사이로, 남준은 저를 잡아먹을 것 같은 화염 앞에 섰다. 타닥대는 불길이 금방이라도 온 지구를 뒤덮을 것마냥 끈질기게 타올랐다. 잿빛 폐허 속에서 이토록 생명력 넘치는 것이 또 있을까. 살아있음은 곧 아름다움을 뜻했다. 그렇기에 그 불꽃은 아름다웠다. 꼭 그를 품고 있는 사람마냥, 아름다워 제대로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없을 정도임을 알았다. 남준은 천천히 불길 속으로 발을 옮겼다. 소방관이었던 그가 마주했던 그 어떤 불보다도 깊었다. 불길 속에서 저를 향해 손을 내뻗던 수많은 얼굴들을 기억했다. 그를 저지하는 정찰대원의 목소리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불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멈춰본 적 없는 남준이었다.

 

오른팔을 바싹 그러쥔 남준은 홀린 듯 지옥불 사이로 제 몸을 던졌다. 흰 옷에 거센 불이 붙은 건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시금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남준은 온 몸으로 불을 안았다. 불의 가운데,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괴생명체들을 향해 내뻗는 불 속을 하릴없이 걷는 이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괴물. 석진이었다.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남준은 무너질 만큼 엉망이 된 석진의 표정을 보았다. 꺼지지 않는 불꽃 속에서도 석진의 아린 눈물 만큼은 마르지 않았다. 남준이 타들어가는 목소리를 짜내어 석진을 불렀다. 형, 우리. 우리 살아 나가기로…. 나가기로 나랑 약속…. 문장은 끝을 맺지 못했다. 석진은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더운 눈물이 땅을 만나 기름에 붙은 것 마냥 타올랐다. 열기에 스러져 가면서도 남준은 팔을 뻗어냈다. 폐허가 이리도 만만한 줄 알았다면. 저 사람이 이토록 신을 닮은 사람이었음을, 왜 난. 귀를 찢는 울음소리가 점점 피치를 높인다. 남준은 마지막 힘을 다해 마른 입술을 떼었다. 형, 나는…. 꼭, 형을….

 

 

 

형을 치유해주고 싶었어요.

 

 

 

남준은 그대로 몸이 고꾸라짐을 느꼈다. 단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불과의 싸움에서, 최후의 패배를 석진에게 줄 수 있음에 그는 아릿하게 눈을 감았다. 석진은 틈 없이 울었다. 아주 긴 눈물이 파도처럼 불을 만난다. 불꽃도 꽃인 지라, 채 담지 못할 꽃말이 존재했다. 소리쳐도 나오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충분해, 남준아. 나 네 덕분에 너무 괜찮았어. 하나도 안 외로웠어. 죽어가는 도시가, 이 지구가 못다할 만큼 사랑스러웠어. 채 전하지 못한 말은 화염과 함께 날았다.

 

불길이 온 도시를 향해 뻗어나갔다.

 

비로소, 멸망이었다.

 

 

 

- FIN.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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