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핌 (seraphim)
w. 백반
속보입니다. 지난 10일, 서울 관악구 인근 도로에서 괴한에게 납치된 것으로 밝혀진
29살 김 모씨가 실종된 지 39일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김 모씨는 발견 당시 공원 화장실에서 의문의 약물을 복용한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으며, 현재 연이은 불안증세를 보여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에 서울지방경찰청에서는-’
“강형사니임, 나 물 좀 줘요”
TV 속 앵커의 말을 잘라낸 석진이 애교스럽게 말 끝을 늘이며 이야기 했다.
“침 삼켜 새끼야,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눈썹을 치켜올린 강형사가 대번에 잘라내자 석진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가 어색하게 풀어졌다.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올린 석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수작은 형사님이 부리는 거죠, 나한테”
“물 여기 있습니다”
태훈아 정신 똑바로 안 차리냐, 신입 딱지가 붙은 순경에게 건네받은 물을 한 모금
마신 석진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물컵을 내려놓았다.
“왜요, 정신 좀 못 차리면 어때”
“넌 정신을 못 차려도 몇 년 썩으면 되는데 얜 아니잖냐”
담배를 입에 문 강재민이 웃으며 뒤를 돌았고, 그대로 병실을 지나치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허리 춤에 한 쪽 손을 얹고 기가 차다는 듯 걸음을 멈춰선 그녀가 말했다. 병실에서 금연인 거 모르세요? 아 예에, 몰랐습니다- 왼쪽 손을 흔들며 담배를 대충 주머니에 박아넣은 강재민은 저를 빤히 바라보던 석진에게 말했다. 석진아, 뒤지기 싫으면 빨랑 불어야지
“니들 장난질 쳐 놓은 백신 어딨어?”
“하, 나 참..형사니임, 나 이제 그런 거 안 한다니까요?”
억울함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재민에게 호소하는 석진의 목 울대가 서서히 붉어졌다.
넌 진짜 연기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급이다.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 줘. 싫어요, 이 얼굴이 얼마나 쓸모 있는 얼굴인데- 익숙한 듯 아랫입술을 검지손가락으로 흝어낸 재민이 턱 끝으로
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태훈아 문 닫아, 시끄럽다”
급하게 닫힌 문 뒤로 석진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때마침 병실을 지나던 의료진들이 병실 문을
열어 젖혔고, 강형사는 호출을 받았다. 아니 경장님, 그게- 고개를 조아리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해대는 강형사를 슬쩍 올려다보던 석진은 바닥에 엎어진 채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정신 나간 새끼야, 요즘 세상에 누가 폭력을 휘둘러, 미쳤어?!”
“..경장님, 얘 진짜 냄새가 난다니까요?”
“강형사님 지인짜 섭섭하게 구신다, 아아..!”
석진의 앓는 소리가 경찰서 내에 울려퍼졌다. 묘하게 규칙적인 소리에 김경장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고, 석진의 입술을 죄다 터뜨려놓은 장본인 강재민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섭섭한 건 이 쪽이지, 그 시간에 너가 성중고 근처를 왜 지나가?”
“고향 생각나서 잠깐 들린거에요- 아니 왜, 다들 그런 적 있지 않나?”
억울한 듯 주위를 둘러보던 석진이 손에 들린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짧게 울린 진동에 강재민의 눈빛이 살기를 띈 모양으로 변했고, 석진은 애써 침착한 듯
길게 눈을 감았다 뜨며 짧게 숨을 내뱉었다.
“강형사님, 이건-”
“죄송합니다. 일행인데요”
석진의 말을 가로막은 건 검은 수녀복 차림의 웬 여자였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젋은 수녀는 왼쪽 다리를 꼬고서 저를 올려다보는 석진을 보지도 않은 채 지긋지긋한
형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이 웃으며 어색하게 내민 서류에 재빨리 서명을 한 뒤 그녀는
석진에게 가자는 눈짓을 했다.
“그 인간은 안 와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자제하시는 편입니다.”
“그 말인즉슨 난 특별하지가 않다?”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지른 석진이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휴대폰을 꺼내들어 좀 전의
문자를 확인했다.
[못 가는 대신 다른 분께 부탁드렸습니다. 조심히 오세요 –알폰소-]
이름 한번 드럽게 고결한 재수없는 새끼
세라핌 (seraphim)
W.백반
재앙은 생각보다 아주 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견고한 벽인 마냥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이미 불안함을 감지한 소수의 사람들의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안에 떨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이 세계를 떠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더 높고 견고한 벽이 세워진 곳을 찾아 헤맬 때 쯤, 언론에서는 유명 연예인의 찌라시들을 이틀에 한 번 꼴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나라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지기 3일 전까지 유명 국회의원의 성 추문 동영상이 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퍼져나가고, 그를 필두로 수 많은 기업가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반 강제로 눈과 귀를 틀어막힌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재앙 덩어리를 알지 못한 채 열과 성을 다해 그 개 쓰레기 집단들을 글로, 입으로 잘근잘근 씹어댔다.
단 66일만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종말이니 멸망이니 떠들어대던 것들이 온갖 미사어구를 죄다 끌고 와서는 아직 살 만한 세상이라며 말을 바꿨다. 하루가 멀다하고 찌라시를 터뜨리던 언론도 이제는 무능한 정부를 공격하기 바빴다. 다들 순발력이 장난 아니네, 가짜 백신이 담긴 약 봉투들을 담은 석진은 아직도 생생한 2년 전 교도소의 일을 떠올렸다.
“너 그거 알지, 5년 전에 전염병 돌았던 거”
5년 전이라 함은 석진이 열 여덟살이 되던 해를 말한다. 한창 중국에서 떠돌던 바이러스가 관광객들로 인해 여기저기 나돌아 근 3개월만에 멸망 직전까지 갔던 시기였다. 왼쪽 가슴팍에다 빨간 딱지 붙인 두 달 선배가 근엄하게 지껄이는 말에 하품을 쩍쩍 해대며 경청하고 있자니
석진은 좀이 쑤셨다.
질문이 있다며 왼 손을 들어올린 석진에게 빨간딱지 선배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말해봐
“결론부터 말해줘요, 나 졸린데”
방 안에 침묵이 돌았다. 옆 자리에 앉은 파란딱지 형이 침을 꼴깍 삼키며 눈치를 봤다. 열변을 토하던 빨간딱지 선배가 석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쟤 진짜 물건이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석진을 주시한 빨간딱지 선배가 입을 열었다.
“칼로 쑤시고 총으로 쏴 죽여도 안 뒤지는 새끼들이 산에다가 무리 짓고 산다는 거, 니들도 들어봤지? 그거 진짜야”
빨간 딱지 선배는 예언가가 분명했다. 이튿날 교도소에서 벌어진 참혹한 장면을 표정 변화없이 덤덤하게 읽어내린 아나운서의 모습이 석진의 기억에 선명하게 박혔다.
‘인근 야산과 밀접한 지대에 있던 교도소에서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끔찍한 유혈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교도소 내부의 단 한 명을 제외한 수십명의 죄수, 교도관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요, 문제는 사람이 제압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이들이 교도소를 빠져나와 무리로 몰려다니며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국과수에서는 이 생존자 한 명을 추적하여 앞으로 있을 끔찍한 사태에 대비하여 백신 개발에 앞장 설 것을 약속했으며-’
그 ‘무리’라는 것들이 도심을 휘젓고 다녔을 때, 석진은 단 한 명의 생존자라는 이유로 온갖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 무렵 B라는 집단이 유명세를 탔다. 정부에서 긴급으로 들여와 배포하는 백신의 위치를 누구보다 빨리 잡아채 두 세배는 부풀려 팔아 넘기는 일명 쓰레기 집단
가짜 백신을 판매하는 일을 맡은 이 집단은 일본에서 건너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한국인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석진의 존재를 매우 흥미롭게 여겼다. 수십 명의 좀비들 사이 유일한 생존자라니, 석진은 B 집단에 들어서기 전부터 굉장한 인간이었고, 그 집단에 들어서고 난 다음부터는 더더욱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적어도 그들에겐 그랬다.
노크도 없이 열린 문 쪽으로 성서를 읽고 있던 알폰소의 시선이 옮겨졌다.
“인사 드리러 왔어요”
“말렸는데, 워낙 막무가내라-”
난처한 표정의 올리비아 수녀가 석진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는 손짓을 해 보인 알폰소가 석진에게 말했다.
“네, 방은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네요”
“별로에요, 혼자 자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아, 그러시구나”
다시 성서로 눈을 내리 깐 알폰소에게 성큼 다가선 석진이 책상 위 접시에 올려진 복숭아를 집어들고는 물었다.
“복숭아네요?”
“네, 그렇습니다만”
“맛있는 건 제 때 먹어야죠, 안 그러면 썩어 문드러지잖아 흉하게”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 석진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
종교의 힘은 위대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전파된 전염병이 세계를 장악해 수십,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을 때 수도원에서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고 예언했고, 그 예언은 정확히 66일만에 이루어졌다.
노쇠한 신부는 자신의 다음 대를 이을 젊은 신부를 임명했고, 다음 날 그가 소천하고 난 뒤 젊은 신부는 장례식 유언장을 낭독했다. 미카엘 신부는 대대적으로 사람들이 알고있는 유언장 이외에 다른 유언장을 남겼는데, 그것은 보통의 유언장과는 조금 다른 향상을 띄고 있었다.
한 장의 사진과 달랑 주소지 하나만 적힌 흰 색의 종이, 그리고 사진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후원증서였다.
“일이공사, 면회다”
알폰소 신부는 우선 주소지에 적힌 교도소를 찾아 직접 방문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외출이 뜸했던 그가 신부복을 입은 채 교도소를 찾는 바람에 죄수번호 일이공사는 뜻밖의
관심을 받았는데, 다름이 아니라 두 사람이 앉은 모습은 마치
“되게 기분이 묘하네”
“....”
“아니, 고해성사라도 해야 할 것 같잖아”
라서였다. 황당한 얼굴의 석진이 투명한 유리 너머 단정한 차림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신부는 제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갈색 서류봉투에서 미카엘 신부가 남긴 후원증서를 꺼내보였다.
“출소하시면, 종이에 적힌 주소로 오시면 됩니다. 밑에 적힌 건 제 연락처구요”
주소따윈 석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을 알폰소라고 소개한 남자의 이름은 민윤기였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으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출소하게 된 석진은 꽤 오랜 시간을 B 집단에 머물렀다. 알폰소에게 석진이 연락하게 된 이유는 머물던 숙소가 전기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여러모로 불편을 느껴서였다.
“티비는 개뿔, 라디오 밖에 안 나와 지금”
B집단의 리더 행세를 하던 심현수가 툴툴 거리며 늘어놓은 말에 석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다른 건 나와?”
“아니, 냉장고 티비 거의 다 안 돼”
단호하게 대답한 심현수와 눈이 마주치고, 석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라디오만 쳐 듣고 어떻게 살아, 난 못 살아’
순간, 저 멀리서 오래된 라디오 안테나 선을 만지던 호영이 외쳤다.
“씨발, 얘도 맛 갔어!”
재앙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석진이 체감한 것은 오늘이었으므로 석진에게 재앙은 오늘부터 시작이었다. 지금 당장 바깥으로 뛰어나가 저 기괴한 생명체들에게 목덜미를 뜯어먹혀 흉물스러운 모양새로 거리를 뛰어다니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것이 진절머리나게 싫었다.
*
“세라핌”
본당에 발을 들인 지 3일 째가 되던, 석진이 윤기의 서재를 들락날락 거리는 것이 부쩍 자연스러워진 어느 날, 윤기가 대뜸 건넨 말에 석진이 되물었다.
“네?”
“..그렇게 적혀 있던데”
“아아, 그거”
석진은 제 이름이 적혀있던 후원증서를 떠올렸다. 이름 옆에 나란히 새겨진 세례명을 입에 담은 윤기가 석진에게 물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어요?”
어쩐지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빛을 마주한 석진이 대답했다.
“미카엘한테 졸랐어요, 어감이 예뻐서”
“아..요즘은 다들 그렇게 하니까”
요즘은, 거슬리는 단어에 눈을 몇 번 깜박인 석진이 물었다.
“그럼 원래는 어떻게 하는데요?”
석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성서를 읽어내리던 윤기가 말했다.
“보통 존경하는 성인들 이름을 따서 짓죠”
“아아..존경하는-”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인 석진이 윤기의 서재를 박차고 나섰다. 큰 소리가 났지만 어느정도 석진의 반응을 예상한 윤기가 고집스럽게 성서에 시선을 두었다.
올리비아가 여느 때와 같이 석진에게 언질을 주자, 석진이 한껏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알폰소 신부 세례명 말이에요, 존경해서 지은 거라던데”
“네, 그렇죠”
단호하게 대답한 올리비아를 빤히 바라보던 석진이 말을 이었다.
“보통 세례명을 그렇게 짓진 않잖아요?”
“..왜죠?”
의아한 듯 되물은 올리비아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그녀의 걸음을 따라잡으려 걸음을 빨리 한 석진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알폰소 끝이 좋지 않잖아요, 도끼 맞아서 뒤지던데?”
탁, 걸음을 멈춘 올리비아가 석진에게 딱 잘라 말했다.
“형제님, 그걸 천주교에선 순교라고 한답니다”
멍하게 서 있는 석진을 뒤로하고 올리비아가 고해소로 통하는 지름길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그녀가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던 석진이 입을 놀렸다.
“왜 지가 화를 내고 지랄이야”
*
B 집단의 기지는 번화가에 위치한 백화점이었다. 언젠가 vip 고객 자격으로 그 곳을 출입하던 일부 사람들은 언제 판매가 시작될지 모르는 백신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위협을 무릎쓰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안내 음성을 기다렸다.
한편 기지 안에선 때 아닌 소란이 일었다. 갑작스럽게 정부군이 들이닥치고, 그들은 자비없이 기지 안의 집단들을 모조리 색출해 끌고갔으며 서재나 탁상 위의 것들을 커다란 박스에 넣어 운반하기 시작했다. 선두에 서서 정부군을 지휘하던 김경장의 뒤에 서있던 강재민은 점퍼 주머니에서 울려대는 옛날 기종의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댔다.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저에요, 강형사님
“..니가 어쩐 일이냐, 협조를 다 하고”
-양심없이 사는건 좀 질려서요
참나, 그걸 이렇게 늦게 깨달아서 어쩌냐? 강형사의 목소리가 서재 안에 울려퍼졌다.
책상 위를 비집고 앉은 석진이 성서로 시선을 내리박고 꼼짝 않는 윤기에게
들으란 듯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한껏 착해져보려구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석진은 책상 위에서 내려와 여전히 제게는 시선도 주지 않는 윤기에게 물었다.
“신부님은 살면서 가장 크게 지은 죄가 뭐에요?”
“죄의 크기는 감히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겠죠”
“그러면 참 좋겠다”
윤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짧게 한숨을 내쉰 윤기가 고개를 들어 석진을 마주본 채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 하고싶은거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재 문을 닫고 나온 석진이 닫힌 문가를 지탱하고 선 채 낮게 읊조렸다.
“나도 너가 지은 죄를 몰랐으면 좋겠네요, 잘나신 신부님”
둔탁한 굉음이 학교 복도를 울렸다. 방금 전 체육선생의 머리를 깨뜨린 성훈이 놓친 야구배트가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그 덕에 야구부 주장인 민수의 어깨를 내려친 윤기가 어깨를 흠칫 떨며 바닥을 향해 시선을 떨구었고, 어깨를 빗겨맞은 민수는 성훈이 방심한 틈을 타 재빨리 달려들어 귀를 물어뜯었다.
“아악-!!”
씨발, 야 저 새끼 잡아 빨리- 왼쪽 귀를 부여잡고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훈이 민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가쁘게 숨을 내쉰 윤기가 민수의 등허리를 배트로 가격했다. 강한 파열음이 복도를 울렸다. 큰 소리가 울리자마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윤기는 겁에 질린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성훈의 눈동자가 점차 붉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일그러진 표정의 윤기가 어느새 제 발치에 떨어져 있는 야구배트를 들고 반대편 계단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윤기야, 어디가 나 데려가야지 같이 가 하고선 울부짖는 성훈을 뒤로하고 무작정 달리던 윤기는 옥상을 떠올렸다. 야구 배트 두 개를 끌어안고 계단을 오른 끝에 굳게 닫힌 옥상문 앞에 도착한 윤기가 온통 땀을 젖은 운동복 소매를 치켜올리고 있을 때
예고없이 옥상문이 열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윤기가 행동을 멈추고 문 사이의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신부님, 신부님-”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윤기가 놀란 듯 그 자리에 멈춰선 올리비아를
올려다 보았다.
“하아..미안해요.무슨 일이죠?”
“신부님, 지금 고해소에 한 번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석진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들리고, 창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나무 창틀 사이로 알폰소의 희여멀건한 얼굴이 보였다. 넋을 놓고 있던 석진이 급하게 눈을 내리깔고 성호를 그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시니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며 그 동안 지은 죄를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알폰소의 목소리가 고해소에 울려 퍼졌다. 발 끝부터 타고 올라온 짜릿함이 온 몸을 감쌌다. 석진은 달싹거리는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냈다.
“저는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쳤어요”
“가짜 백신이랍시고 마약을 몇 백, 몇 천에 팔아넘기고 그리고 또...”
석진의 고해성사는 차례차례 몇 년을 거슬러 올라가 열 여덟 무렵의 어느날까지 도달했다.
“5년 전에, 사람을 죽였어요”
석진이 내뱉은 말에 알폰소가 감았던 눈을 떴다.
“누가 죽이라고 해서 사람을 처음 죽여봤는데, 죄책감이 안 느껴졌어요”
“...무서웠거든요, 잡아 먹힐까봐..나도 징그럽게 변할까봐”
기괴한 모양새를 하고 제게 달려든 놈들은 죄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와 같이 웃고 떠들던 동급생이거나 선생님이었다. 땅이 진동하고 계단을 올라오는 수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석진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야구배트를 끌어안고 있던 운동복 차림의 남학생이 제게
야구배트를 내밀었다. 고개를 세차게 저은 석진에게 남학생이 소리쳤다.
-씨발, 그럼 둘 다 죽자고?!
-..흐윽, 그게 아니라
-뒤지기 싫으면 빨리 들어, 개죽음 당하지 말고
‘미카엘 신부님, 제가..제가..사람을 죽였어요’
‘성훈이도, 어..그게, 성훈이도 갑자기 눈이 벌개져서,
아니, 내가 데리고 나왔어야 하는데 혼자 도망쳐서 걔가, 걔가 그렇게-’
알폰소는 5년 전 미카엘 신부 앞에서 죄를 낱낱이 토해내던 열 일곱의 민윤기가 되어
석진이 느릿하게 토해내는 고해성사를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귀에 담았다.
쉬지 않고 말을 뱉어낸 석진이 낮게 한숨을 내뱉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기나긴 고해성사가 끝났다. 민윤기, 그러니까 알폰소 신부는 사제로 임명 받은 이후
처음으로 보속을 잊었다. 고해소 문이 닫히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고해소에서
무릎을 꿇은 알폰소는 석진이 토해내고 간 문장 하나 하나에 난도질 당하며 울었다.
“신부님이 순두부찌개도 먹네”
석진이 툭 하고 한 마디를 던지자 눈 앞에 놓인 두부 반찬마냥 허여멀건한 얼굴의 윤기가 웃었다. 한 쪽 손으로 턱을 괸 석진이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윤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예고없이 그가 내뱉은 말에 윤기의 안면이 서서히 굳어졌다.
“손가락이 되게 기네요, 신부님”
거칠고 투박하고, 단단하고, 또...
석진의 말이 끝나기 전에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짚었다.
“그만하시죠,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잔뜩 굳어진 얼굴로 석진에게 경고한 윤기가 계단으로 향했고,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석진은 급히 계단을 오르는 윤기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밤은 찾아왔다. 새까맣게 칠해진 밤 하늘 밑으로 페허가 되어버린 마을이
보이고, 그 마을 중앙에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성당 안의 누군가가 바삐 움직이고있었다.
윤기가 숨을 죽였다. 기다란 복도 끝에 위치한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족쇄라도 채워진 듯 묵직하다. 문고리를 잡아돌린 윤기를 반긴 것은 석진이었다. 내 방엔 어쩐 일이에요? 노크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맞이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말간 얼굴을 한 석진이 물었다.
“..안부 차 들렀어요”
벽에 걸린 시계가 열두시를 가리켰다. 입꼬리를 말아올린 석진이 방 안으로 들어선 윤기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문고리를 걸어잠궜다. 신부님,
“내 세례명 말이에요, 어떤 뜻인지 가르쳐 줄 수 있어요?”
“.....”
“우리 신부님은 꼭 알 것 같아서”
재앙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재앙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술을 부딪혀 온다. 달콤한 체향을 뿜어내는 재앙이 제게 말한다.
“신부님, 우리 같이 지옥가요”
알폰소 신부의 사제복을 끌어내리며 석진은 미카엘 신부가 남긴 편지내용을 떠올렸다.
‘나는 자네를 꼭 천국에서 만나고 싶네’
미카엘, 미카엘은 갑갑한 천국에서 영원히 사세요.
우린 매일을 고결한 지옥에서 불타오르며 찬란하게 죽어갈테니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John 20: 22-23-
-세라핌 (seraphim) : 불타오르는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