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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禁

w. 9p

딱히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공을 쥐고 하늘만 보고 살았다.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있을 이상과 꿈. 저곳에 닿을 미래만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좇고자 하는 것이 생겨버린 순간 차단되는 세상. 그 감각은 겪어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겠지.

 

공을 던지면 세상이 멈췄다. 콩나물 대가리 따위들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관중석의 풍경이 바닥으로 처박히고, 몸을 조금 움직이면 어느 순간부터 하늘 위를 걷고 있었다. 그 푸른 곳을 계속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한참 동안 보고 있으면 정신이 든다. 얼룩 없이 시퍼렇기만 한 그 하늘의 한가운데를 가르는 물체는 본 적이 별로 없다. 영문을 모른 채 눈을 깜빡이고 나면 반대편의 투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서 있다. 맥박의 뜀박질이 가파르지 아니하여 따분함이라는 감각의 문턱에 발을 들일 즈음 경기의 끝을 알리는 상대편 선수들의 처절한 눈빛이 한데 모이면, 태형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가만히 손에 쥐었다.

 

도대체 왜, 못 치는 걸까.

 

온 정신이 흔들릴 정도로 위태로운 공이었을 텐데. 몸과 마음이 모두 흔들리는 투수가 좋은 공을 던질 리가 없는데. 태형은 자신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감독과 동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신기한 사람들이다. 보는 눈도 별로 없고 사람의 감정에 대한 자각도 그다지 없는, 과정은 집어치우고 결과만 중시하며 갈구하는 사람들.

 

경기가 끝난 뒤 운 좋게 빌렸던 버스를 타고 터널을 지날 때까지도 태형은 무리에서 내뿜는 축제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했다. 옆자리에 앉은 지민이 건넨 콜라나 홀짝이면서 창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였다. 지민을 포함한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은 그런 태형의 태도에 일제히,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녀석의 저런 이상한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은 거짓말이겠지만 서도 특별히 아주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익숙해지면 별 탈 없었고 우선적으로 팀에 있어서 김태형이라는 존재는 아주 중요한, 팀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최대한 놈의 성격에 맞춰주고 져주는 것이 암묵적 규칙이라면 규칙이었다.

 

 

“아따, 얌마. 아무리 그래도 좀 웃지 그르냐? 너무 불행해 보이는디.”

 

“불행하지 않은데요.”

 

“그러니까 말이 그렇다는거 아니여. 기뻐? 기쁘냐?”

 

“이긴 거야 물론 기쁘죠. ”

 

“흐미. 그런디 와 그렇게 울상이다냐.”

 

 

굳이 몸을 돌려서는 태형을 향해 열심히 농담 따먹기를 하는 호석을 보며 지민은 혀를 찬다. 선배. 그만두세요. 저 녀석이 그런다고 우리 말 듣겠어요? 되에게 이상한 애인 거 선배도 잘 아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지민도 태형의 표정에 일말의 변화가 생겼을까 싶었는지 평온한 얼굴을 곁눈질로 살피기 바쁘다. 태형은 그들을 상대하고 있자니 급격히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어 곧장 이마를 창가에 파묻어버렸다. 퉁. 둔탁한 소리에 흠칫 어깨를 움츠린 지민이 태형의 손에 든 콜라 캔을 빼앗아 든다.

 

 

“또 버스 엉망으로 만들려고. 너 말야, 잘 거면 좀 곱게 자라고!”

 

 

참 끈질긴 간섭이다. 태형은 대충 손을 휘적이곤 눈을 감아내렸다. 옆에서 지민이 무어라 잔소리를 늘어놓는 듯 싶지만 그 긴 얘기를 잠자코 들어주는 흥미는 없었다. 눈두덩이가 무겁다. 익숙해진지 꽤 됐지만, 언제가 되었건 이런 식으로 급격히 찾아오는 피로는 기분이 더럽다.

 

 

 

 

 

-

 

 

 

 

 

어쩐 일인지 경기란 경기는 다 이겨놓고도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잠결에 눈을 살짝 떴었던 것 같기도 한데, 벌써 터널을 몇 개째 통과하는 건지. 아직까지도 고속도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다시금 신경질적으로 눈을 감는다. 버스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는데, 분명 잠에 들고 시간이 꽤나 지났을 테니 열정적으로 축제 분위기를 즐기던 그들도 질려 곯아떨어졌을 것이라고, 태형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나저나 버스가 이렇게 편안했던가. 도로 위에 그대로 정차되어 있는 것만 같은 고요한 감각. 잔잔한 파도 아래로 영원히 잠식될 것만 같은 기분.

 

어딘지 모르게 묘한 것을.

 

 

 

-

 

 

 

 

 

복부를 쥐어짜는 듯한 낯선 감각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꿈속의 낙원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바꾸어 버렸다. 끝없는 어두움. 시퍼런 것에 잔뜩 얼룩이 지면 이런 그림이 되는 걸까. 태형은 요추가 이끌어내는 순간적인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일으켰다. 이유 모를 신음과 탄식, 혹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들숨과 날숨으로 뒤섞여 메마른 입술 사이를 비집고 터져 나온다. 반투명하게 흐릿한 시야 탓에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할 수 없어 고개를 세차게 휘젓는다. 말라비틀어진 듯 아무리 목젖을 움직여도 나오지 않는 침에 목덜미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내던 태형이 겨우 되찾은 초점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아아. 이게 무슨 상황일까. 때묻음 없는 백색으로 가득 채워진, 어쩌면 병실 같기도 하고 어쩌면 평범한 방 같기도 한 곳. 반듯한 직사각형임에 틀림없는 방에는 구석탱이에 병실 침대 하나가 처박혀 있었고, 그 위에 태형의 몸뚱아리 하나만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상태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스라이 쑤셔오는 머리를 부여잡은 태형이 신발 하나 신겨져 있지 않은 맨발을 차가운 바닥 위로 내딛는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어.”

 

 

어째선지 색채가 느껴지는 목소리. 태형은 고개를 들어올려 잘 보이지 않았던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본다. 걸친 가운도 참으로 얼룩 없이 하얘서, 동일한 색감의 벽 앞에 서 있으니 사정없이 파묻혀 검은 머리칼을 뒤집어쓴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듯 보였다.

 

 

“네가 지금 맞고 있는 약. 신경 안정제거든. 꽤나 독해. 아마 온몸에 힘도 없고 팔 다리가 흐물흐물할걸. 익숙해지면 조금 괜찮겠지만…….”

 

“어디예요?”

 

“뭐?”

 

“지금 여기, 어디냐고요.”

 

 

……상당히 공격적이구나. 말투도, 표정도, 눈빛도. 남자는 작게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사납나, 내가. 가만히 턱을 긁적이던 태형이 땅바닥을 딛고 일어나 보려 애썼으나 발바닥으로 간신히 전해진 힘은 얼마 못 가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소용없을 거라니까. 가운 주머니에 한 손을 쑤셔 넣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남자가 태형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온다. 태형은 경계라는 개념을 잊어버린 사람인 것처럼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가까워질 때마다 한눈에 담기는 오목조목한 얼굴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름 김태형. 생년월일 2002년 12월 30일. 수도권 고등학교 야구부로 활약 중.”

 

“…….”

 

“아마 지금이 네가 온전히 네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 거야.”

 

“…….”

 

“이제 네 이름은 김태형이 아니거든.”

 

 

영원히 올라가지 않을 것만 같던 남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솟는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태형은 그 소소한 표정의 변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19호야. 열아홉 번째 실험체가 된 걸 축하해.”

 

 

 

 

 

 

 

-

 

 

 

 

 

유난히도 기분 나쁜 하루의 시작이었다. 하늘로 뻗은 머리카락은 삼십여 분 가량을 거울 앞에서 사투를 벌여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고, 잠이나 깰 겸 향한 커피 자판기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블랙 대신 밀크를 뽑아 주었다. 공교롭게도 챙겨온 동전이 오백 원 하나뿐이었던 터라 굳이 조금 더 비싼 고급 밀크 커피를 내어 준 고물 덩어리에게 감사를 표할 기분이 아니었다. 연구실 문은 무슨 일인지 걸어 잠가도 자꾸만 열려 말썽이었고, 실험용 도구를 잔뜩 넣어 놓은 보관함의 열쇠 구멍은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꽉 막혀서 열쇠가 들어가질 않았다. 덕분에 창고에 위치한 책상 위에 전시해 놓듯 하나하나 구분해서 늘어놓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이건 뭐 누구 하나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종이컵에 덜어둔 아몬드를 와그작 씹으며 석진은 생각했다. 오늘, 참, 불안하다.

 

 

“선배, 선배님! 크, 큰일, 제대로 일 터졌어요!”

 

 

분명히 잠긴 것을 수차례 확인했던 것 같은데. 공부만 하느라 근력 없이 가녀린 후배의 팔뚝에도 쉽게 열려버리는 문을 말없이 응시하던 석진은 한탄 섞인 숨을 내쉬며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여기에서 제일 가까운 제3터널 있잖아요. 아직 관리 구역 아닌 곳이요. 그 근처에 감염자가 발견됐는데, 그 감염자와 접촉한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검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방도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변이된 바이러스에 적응된 키트가 아직은 없는 상태라. 어떻게 하면 좋죠?”

 

“잠깐, 뭐라고?”

 

“방이 부족하고 키트도 없는,”

 

“아니. 그 전에.”

 

“네?”

 

“아이들이라고?”

 

 

이미 적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가움과 동시에 딱딱한 테이블 위로 종이컵을 내려놓는다. 석진의 입안에서 아직 차마 제대로 씹히지 못한 아몬드 한 알이 혀와 입천장 사이를 뒹굴었다.

 

경험을 거쳐 시간의 흐름을 정통으로 맞은 사람에게는 본능이 생긴다. 쉽게 말해 ‘감’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때때로 참… 무섭다.

 

 

 

 

 

 

 

-

 

 

 

 

 

글쎄.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 그도 그럴 게 이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제일 근접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뿐이니까. 네가 자각해야 할 제일 중요한 사실은, 지구가 망했다는 거야. 세상이 무너졌고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렸어. 최초 발생지가 어디인지, 원인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지역을 폐쇄하고 필사적으로 막았어야 했는데, 원래 완벽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는 거라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곳에 치우치지 못한다는 세상의 이치가 이런 부분에서까지 적용될 줄이야. 신도 참 너무하시지 않니? 우리 인류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쥐어주긴 했을지 의구심이 든다. 이제는 정말로 안전 지역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렸어. 너희가 잠든 사이에 바이러스가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거든. 불과 사흘 만에 벌어진 일이야, 이게. 우리나라 언론의 무능력함과 추악함이 이렇게 드러난다.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급하고 독하게 마음먹지만 않았어도 몇 명이라도 더 살아남았겠지. 과장이 그 녀석들 특기잖아.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았지 뭐. 그래서 결론은 말이다 19호.

 

너희는 운이 좋았던 거야. 그 감독이라는 분이 감염은 된 상태였지만 정신력이 상당히 강하셨던 덕분이었지. 조금만 더 늦었어도 목이 두 동강 난 게 그 사람이 아니라 너희였을 테니까. 만약 너희 감독이 뉴스를 수시로 확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너희 팀원 중 한 명이 시험 공부를 하겠답시고 필통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그 속에 새로 산지 얼마 되지 않은 커터칼이 들어 있지 않았더라면? 그 감독이 자신의 목덜미를 칼로 찔러버리는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지금쯤 너는 이곳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 터널에 처박혀 바리게이트를 손톱으로 박박 긁거나 변해버린 다른 녀석들과 함께 먹이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었겠지.

 

 

 

…… 아저씨.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뭐야 갑자기. 알아서 뭐 하게.

 

그냥, 궁금해서요. 이상하잖아요. 아저씨는 내 이름도 알고, 번호까지 붙여줬는데. 나는 아저씨 이름을 전혀 모른다는 게.

 

석진. 김석진.

 

…… 김석진.

 

마음에 드네.

 

 

 

 

 

-

 

 

 

 

 

 

 

그에게서는 따뜻하고 몽롱한 분위기가 났다.

 

이제 막 봄이 된 것 마냥 향기롭고, 무수히 많을 것까지야 없지만 언뜻 언뜻 모습을 비추는 벚꽃잎처럼. 은은하고 아련한, 절제된 감정.

 

태형은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 차트로 보이는 종이 쪼가리에다가 뭘 그리 열심히도 적는 석진을 보며 그가 타온 차를 홀짝이는 것을 즐겼다. 손목에 꽂혀 있는 바늘은 어느샌가부터 익숙해져 버려서 이제는 그 바늘이 몸에서 빠져나간 순간이 제일 공허했다. 심지어는 태형을 가둬두고 있는 이 사방면이 하얀 공간은, 계속 보고 있다가는 오바이트를 쏟아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징그러웠으나 끝끝내 그런 짓은 벌이지 않았고 오히려 어두운 색만 보면 어딘가 이상함이 느껴지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구름들을 한데 뭉쳐서 올려놓은 듯한 천장을 올려다본 태형이 석진을 향해 물었다. 오늘 몇 월 며칠인가요? 이제는 아주 전용 의자까지 가져다 놓고 열심히 일지 비스무리한 것을 써 내려가던 석진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네가 오고 나서 이 주 지났어. 날짜가 얼마나 어떻게 흐르고 지나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서서히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지민과 호석 등등 팀원들의 얼굴들에 그래도 꽤나 이 상태로 갇혀 있었구나, 하고 실감하고 만다.

 

 

“친구가 보고 싶어요.”

 

“친구 누구? 같이 실려온 애들이 워낙 많아야지.”

 

“지민이요. 박지민. 그리고 호석 선배도.”

 

“지민. 지민이라….”

 

 

석진이 들고 있던 차트 위로 펜을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몸을 일으켜 찌뿌드드한 듯 기지개를 켜더니 그대로 누워 있는 태형의 발치에 걸터앉았다. 눈으로 대충 링커에 남은 약을 살피고, 태형의 안색을 훑는다. 조금 파리하지만 그건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쭉 그랬으니 별로 신경 쓸 구실은 아니었다. 질문에 대답 않는 석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태형은 미간을 좁혔다. 그 코흘리개 녀석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조금 아득한 예감이 아릿하게 몰려온다.

 

 

“너희 감독과 접촉한 녀석이 있어. 그냥 가벼운 접촉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상처부위에 감독의 피가 새어 들어갔나봐.”

 

“…….”

 

“그래. 박지민이 맞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과 같은 대단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잔잔하고 고요하게, 아주 조금의 충격과 아주 약간의 애도가 섟인 한숨을 토해낸다. 조악한 질감과 형태로 이루어진 걱정 따위는 잘게 부숴서 가슴 한쪽에 밀어 넣어두기로 했다. 바깥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그 끔찍하다는 괴물 녀석들과 직접적으로 마주한 적도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태형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민은 이미 죽은 녀석이었고, 우정이라는 이름이 포용하고 있는 모종의 의리나 믿음 따위의 감정들은 이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다.

 

 

“쓸쓸하니?”

 

“아뇨. 딱히. 그렇게 엄청 친한 녀석도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표정이 상당히 슬픈걸.”

 

“지금 제 표정이 어떤데요?”

 

“아파 보여. 복잡해 보이고.”

 

“복잡하기는 해요. 여러모로요. 근데 그게 박지민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왜 복잡한데?”

 

 

손톱 근처에 조금씩 나기 시작한 거스러미를 뜯어내던 태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려 석진을 마주한다. 복잡하게 뒤엉킨 시선은 그 누구도 풀 생각이 없는 듯 쉽사리 떨어지거나 흩어지지 않았다. 태형은 빙글거리던 입가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아저씨가 자꾸 내 눈 앞에 나타나서요.”

 

 

그래, 맞다. 이 순간 느껴지는 모든 감정들을 그저 이유 없이 뒤섞어서 쓰레기라고 에두를 뿐이었다. 그래봤자 태형은 그 감정들에 붙여야 할 정확한 이름들을 알지도, 구별하지도 못했다. 그런 능력은 애초에 태형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태생부터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라. 단말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짐했다. 저는 흘러가는 대로 느끼겠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곳이 태풍과 폭우로 넘실거리는 해일 위라고 하더라도, 저는 그 흐름을 받아들여야겠습니다.

 

 

 

 

 

-

 

 

 

 

 

“선배님. 이것 좀 봐주세요.”

 

“또 뭔데 진짜. 요즘 다들 왜 이렇게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 죄송하지만 잡아먹는다는 표현은 삼가셨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워낙 그 말에 조금 민감해서요. 다급하게 석진의 이름을 부르던 후배 녀석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버리자, 석진은 얼음장 같은 그 얼굴에 대고 재빠르게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럼. 미안하다. 내가 잠시 잊고 있었어. 그리곤 지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밝고 친절한 표정과 목소리로 대답한다. 무슨 일인데?

 

 

“여기. 19호 세포가 좀 이상해서요. 여기 모습 봐봐요. 혈액 속 혈장을 돌아다니는 거 보이시죠. 분명 저번까지만 해도 바이러스가 보였단 말이죠. 분명 감염된 상태였다구요.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걔네가 전부 흩어지다 못해 먹히고 있잖아요.”

 

“... 설마.”

 

“맞는 것 같지 않아요?”

 

 

항체. 분명 이건 항체예요. 이걸로 백신을 연구하면 된다구요!

 

의심쩍음이 어느 정도 갈피가 잡힘으로써 사그라들고, 이내 확신이 되어 얼굴 가득 미소를 자아낸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리에서 방방 뛰는 후배와 태형의 피를 멍하니 번갈아보던 석진은 이내 실성했다. 길고 긴 연구의 끝자락이 보이고 있음에 대한 기쁨과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등장한 항체에 순간적으로 몰려드는 허탈감이 석진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지금껏 허투로 소비된 죄 없는 아이들의 피와 살덩이들이 뇌리를 스친다. 그 무수한 갯수들은 스스로 번호를 매겨 석진의 머릿속에 남았다. 지우고 싶었으나 지울 수 없는, 지워서는 안 되는 기억들. 누군가는 기억해 줘야지. 자의든 타의든 어찌 되었건 다수를 위해 희생되었던 녀석들이잖아. 그런 말을 밥 먹듯 하며 동료나 후배들을 다그치는 듯했으나 알고 보면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었던 석진은,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한결 놓아도 되는 건가 싶어 뜨거운 열기가 뒤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백신만 있다면 정말이지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감염되어 격리된 사람들을 구할 수 있고,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다. 여유가 된다면 생존자들에게 주입시켜 면역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 문밖의 괴물들의 약점이 뭔지,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 조금 더 쉽고 안전하게 알아낼 수 있다. 백신만 있으면. 그거 하나만 있으면. 어쩌면 다 죽어가는 지구에게 일말의 희망이 되어주지 않을까. 더이상은 운 따위에 목숨을 맡겨 생존했음에 좌절하거나 미친듯이 열광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석진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어떤 일이든지 항상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고, 변수가 생겼다는 것이 그 도전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판가름을 내리기에는 다소 불충분한 근거이기는 하나 아주 완벽한 해결 방안이 아니라는 답은 되었다. 그러니 만약 태형의 피가 정말로 항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항체로 백신을 만들 수 있게 된다면. 그 어떤 변수도 생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어떤 때보다도 철저해야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의 끝자락에 선 석진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릿속으로 정리되는 과정과 수십 가지의 엔딩을 지나쳐 맨 처음. 시작으로 돌아간다. 석진은 어느 순간부터 말라버린 목구멍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시작을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 희생은 늘 목숨을 담보로 삼았다. 결론적으로 이번 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필요에 의해 피만 잔뜩 뽑히는 가죽 따위에 불과한 몸뚱아리가 될 것이다. 석진이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 해도 윗대가리들이 그리 두지 않을 것이 물 보듯 뻔했다. 그래야만 최대한의 피가 나오니까.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질 수 있으니까.

 

그 녀석한테 어떻게 말을 해 줘야 하지.

 

적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실험실로 인도해야 한다는 그 보잘것없는 다짐이 이렇게 발목을 잡았다. 석진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실험실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괴물이 되어가는 인간들의 한 섞인 포효를 지나쳐 태형이 있을 방으로 향한다. 흰 가운 양쪽 주머니에 찔러넣은 두 손을 꼼지락대며 태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보는 애틋한 눈동자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으므로, 석진은 끝까지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철저히 불행한 상황 속에서 사랑의 감정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된다. 그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석진은 그 점 만은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다, 19호.

 

태형이 있을 방문 앞에 서서 석진은 숨을 고른다. 가운 주머니 속에는 얼마 전 태형이 부탁한 야구공이 들어 있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평소와 다름 없이 말을 건네며 야구공을 쥐어줄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약삭빠르고 눈치 좋은 녀석이 절대 알아채지 못 할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해낼 것이다.

 

사람의 손때가 많이 묻지 않은 문고리 위로 석진의 큼지막한 손이 포개진다. 인류의 희망을 위하여. 지구의 생존을 위하여.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래.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

 

 

 

 

 

-

 

 

 

 

 

“언제 오려나 기다렸어요.”

 

“응.”

 

“엄청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여기 앉아서 이 자세 그대로 진짜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 그래.”

 

“표정이 안 좋네요.”

 

“그래 보여?”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머뭇거리는게 여기까지 느껴지는데.

 

태형은 고개를 까딱이며 웃었다. 비틀린 입꼬리가 석진의 시야에 들어옴과 동시에 석진은 고개를 돌렸다. 태형은 그런 석진을 보며 손등에 꽂힌 링거 주사기를 만지작거렸다. 연기를 하는구나. 그것도 아주 어설프게. 평소처럼 해사하게 웃어주지도, 태형의 장난을 유하게 받아쳐주지도 않았다. 물론 태형에게 있어 농담으로 건넨 말은 아니었겠으나 여러가지 분위기나 상대의 태도를 조합해 보아 태형이 뱉는 모든 말 들은 대개 어린애의 두서 없는 말 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신경쓰고 있나. 비록 그 이유가 온전히 태형의 존재뿐인 것은 아닌 것 같았으나, 어찌되었건 상관 없었다.

 

 

“이리 와서 말 해 봐요. 계속 거기 서 있지 말고.”

 

 

태형이 걸터앉은 침대의 옆 자리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 한다. 석진은 우물쭈물 긴 다리를 휘적이며 그의 옆으로 가 엉덩이만 살짝 걸쳤다. 제대로 앉으세요. 무슨 운동해요? 한심하다는 눈빛을 마구 쏘아대는 태형에 괜히 머쓱해진 석진이 하하, 웃어보이며 그제야 제대로 침대 위에 안착한다.

 

 

“왜 오셨는데요.”

 

“뭐, 맨날 오잖아.”

 

“아직 배가 안 고파서요.”

 

“뭐?”

 

“매일 배고플 때 마다 찾아오시거든요. 하루 세 번. 아마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오셨던 거겠죠. 식사 후 쉬는 시간이라던가 연구 목적으로. 그런데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거든요.”

 

 

눈치만 빠른 줄 알았더니 머리도 좋구나.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석진은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해도 태형은 믿지 않을 것 같았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어 석진에게 진실만 말하게끔 유도할 것이었다. 결국 석진은 그럴싸한 밑밥이나 치장한 위로 따위는 배제한 채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감정이 있을텐데. 대놓고 모두를 위해 희생해달라는 말을 어떻게 하지. 짧은 침묵에 숨어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음에도 도무지 그럴싸한 해결방안이 나오지 않음에 좌절했다. 저를 바라보는 태형의 눈은 오히려 괜찮다고 석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결국 딱 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입술에 힘을 준다. 벌어진 틈 사이로 나오는 제 목소리가 심각하리만큼 이질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태형아.”

 

“네.”

 

“김태형.”

 

“그렇게 자꾸 제 이름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말아주세요.”

 

 

진짜 미치겠으니까.

 

뒷말을 삼키며 석진의 얼굴을 바로 본다.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저 도톰한 입술이 어떤 몹쓸 문장을 내뱉으려나. 상상은 미뤄둔 채 태형은 가만히 석진을 감상했다.

 

 

“네 피가 필요해.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전 세계의 모두에게 네 피가 필요해 태형아.”

 

“왜요?”

 

“네 피에서 항체를 발견했어. 그게 바이러스를 전부 먹어치웠어. 그러니까 쉽게 말 해서, 너도 원래는 감염 된 상태였던 거야. 그래서 격리 시켜놨었던 거고. 방금 전 네 피 속의 한 세포가 그 바이러스들을 죽이는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네 피로 백신을 만들 수 있다는거야 태형아.”

 

 

말을 토해내는 눈에서 간절함이 느껴진다. 동시에 사무치는 미안함이 뒤섞여 있는 것이 보여서, 태형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세우고 있느라 쑤셔오는 허리를 뒤로 넘겨 침대 위로 쓰러진다. 움직이는 손을 따라 긴 링거 줄이 흔들리며 반동으로 허공에서 왔다 갔다 흔들렸다. 그 불투명한 관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태형이 고개를 돌려 석진의 불안히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머니가 연구원이셨어요. 아버지는 군인이셨고요. 새벽같이 출근하고 저녁 늦게 돌아오는 생활이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어요. 부모님 금술도 좋으셔서 서로를 아주 사랑하셨고, 저도 무척이나 사랑해 주셨으니까요. 서너 달쯤 전이었나. 어머니가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아졌어요. 얼핏 들은 바로는 이상한 바이러스를 발견했다고. 외국에서 입국한 사람 한 명이 이상한 증세를 나타내서 검사해 봤더니 난생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바이러스가 검출됐다고 했어요. 병이야 뭐 없었다가도 생기고 있었다가도 없어지는 거니까, 평소에 적지 않게 있었던 일이니까 별거 아니라고 여기고 그냥 기다렸어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날따라 일찍 집에 들어온 아버지랑 같이 라면을 끓여 먹고, 같이 텔레비전으로 예능 프로를 봤어요. 몇 없는 소중한 날이었죠. 아버지 다리를 베고 누워 있다가 너무 졸려서 잠에 들기 직전이던 제 귓가에 대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엄마랑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중요한 일 하러 가는거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잠결에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아침이 다 돼서야 눈을 떴는데 정말 가고 없더라고요. 그 뒤로 무작정 기다렸어요. 아주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혼자 밥 차려 먹고 학교 가는 건 나이도 많이 찼으니까 할 수 있었고, 한 달 정도 혼자 지내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집안일에도 능숙했으니까요. 한 달이 넘어가고, 그게 두 달째가 되기 일주일 전. 휴대폰으로 연락이 왔어요.

 

엄마 아빠가 실종됐다고. 남기고 간 건 시체도, 살아 있다는 흔적도 아닌 유서 한 장만 있지만 이거라도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지는 않았어요. 전화 거신 그 분도 엄마 아빠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으셨던 거겠죠. 워낙 착한 분들이셨으니까 동료분들한테도 잘해주셨을 거예요.

 

하루 뒤에 전달 받은 편지를 몇 번이고 읽었어요.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만큼이나 주의사항이 많았어요. 영화에서나 나오던 좀비와 매우 흡사한 괴물이 나타났다고. 비상용 음식이나 물건들 집에 준비해 놓고 문 꼭 잠그고 기다리라고. 물론 그 개체 수가 많은 것은 아니나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처신을 잘 못했을 경우에 정말 아주 큰 일이 생길 거라고. 그런 식의 당부들로 가득한 편지를 읽고 또 읽다가 못 참고 버렸어요. 그냥 미쳐버린 사람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농담은 아닐 테니까. 장난으로 두 달 동안 날 여기 버려두고 집을 비웠을 리가 없으니까. 희망없이 두 달을 버텼어요. 기다리라고 적혀 있긴 했는데 기다려도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왜 모르겠어요. 뉴스나 신문에서는 엄마가 해 줬던 말과 조금도 비슷한 얘기 하나 나오지 않았고, 정상적으로 등교시키는 학교를 다니며 평소처럼 야구도 했어요. 정말 평상시와 다를 것 하나 없었지만, 아주 조금 차이가 생긴 것은 더 이상 야구공을 던질 때 흥분되지 않는다는 것. 경기장 한 가운데에 서 있을 때 행복하지 않다는 것.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알아요. 다 알고 있었어요. 엄마 아빠는 좀비가 됐거나 그 직전에 서로 죽였거나 하겠죠. 지구는 정말 망했고,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는거. 그런데 희망이 생겼다니 다행이네요. 애초에 그런 거 다 내 알 바 아니지만 상관 없어요. 저 죽는거죠? 아, 피가 필요하니 죽이지는 않으려나. 그게 무슨 삶이건 지금이랑 다를 게 있겠나요. 저, 반사회적 인격장애예요. 네 감정 상관없고 내 감정 몰라요. 죽는 거 하나도 두렵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궁금하지 않아요. 이대로 살다가 범죄나 안 저지르면 다행이지. 아저씨한테 도움 된다니 다행이긴 하네요. 어차피 하기 싫다고 해도 해야 하잖아요. 하게 만들 거잖아요. 알아서 하세요 전 상관 없으니까. 무엇보다도 아저씨가 부탁하는 거니까.”

 

 

남의 사연에 관심을 가지고 흔들리는 편은 아니었다. 태형의 얘기만 듣고도 그의 부모님들이 대충 어디에 속해 있고,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죽었어야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석진이 흔들린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이 난리통에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겨진 태형같은 아이들은 뒤만 돌아봐도 한 트럭이었으니까. 흔해서는 안 되지만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많아졌으니까.

 

잘만 가동되던 석진의 심장을 멈춰버린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한 문장에 있었으며,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가 조여오고 피가 거꾸로 솟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비틀걸음으로 몸을 일으키는 석진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린 태형이 괜찮아요? 하고 묻는다. 응. 괜찮아. 벽을 짚고 뜨거운 숨을 수차례 토해내다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걸리는 부분 하나 없이 매끈한 벽은 석진의 손에서 난 땀 때문에 자꾸만 석진을 밀어냈다.

 

 

“내 얘기가 너무 충격적이었나? 이런 반응을 원하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아니야 그런 거. 단지 나는,”

 

“아저씨는?”

 

 

그냥.

 

 

“나도 너랑 꽤 비슷했어서.”

 

“가정사가요? 그렇다고 하기엔 나이가 좀 안 맞는데.”

 

“반사회적 인격장애.”

 

“…….”

 

“그 녀석 때문에 고생 꽤나 했거든.”

 

 

감정은 휘몰아치는 폭풍과도 같아서 휩쓸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빠져든다.

 

- 로 시작하는 기억. 문장을 읊던 목소리가 욕지거리를 내뱉고 이내 폭력으로 변해 머리와 목덜미, 가슴께와 다리까지 완전히 박살을 낼 때까지도 석진은 무엇이 잘못되었고 문제였는지 몰랐다. 억압된 내면에서 들끓는 욕구의 정체에 대해 고뇌할 수 있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석진은 그저 그렇게 자랐고, 황천길의 문턱에 섰으며, 운 좋게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살았다.

 

석진을 발견한 남자가 국가 기밀 연구소의 고위 직급 연구원이었다는 것이 과연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판가름을 내리기도 전에 석진은 반강제적으로 치료에 들어갔다. 망가진 심장을 복구하는, 다시 말해 고장난 인격을 '정상화' 시키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석진은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이 해 왔던 짓들을 되돌아보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 순간에 어떤 대처를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는지 배웠다. 그리고 외웠다. 토씨 하나 틀림이 없이 전부 외워 머릿속에 쌓아두었다. 그것을 치료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석진은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는 평범한 어른이 되었고, 연구원이 되었다. 아주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은 도통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슬퍼야 할 장면에서 울음이 나오는 것은 암기나 지식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주머니에 인공 눈물을 넣고 다니며 제삼자의 뼈저린 서사를 들으며 우는 척을 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받아들였고, 대충 그럴싸한 이유로 치장했다.

 

그냥. 감정에 휩싸이면 돌아오기 힘드니까.

 

돌이켜보니 세상에서 제일 혐오스러웠던 사람이 했던 말을 제가 반복하고 있었다.

 

 

“눈물이 뭐가 중요해요. 그딴 게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글쎄.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위로가 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눈물은 기쁠 때에도 흘린다는데, 난 거기까지는 이해가 안 되더라.”

 

“풉.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아깝달까. 희생? 그딴거 왜 하는지 이해도 안 되고. 울 시간에 밥이나 먹을래요.”

 

 

저 배고파요 아저씨.

 

 

순수한 해맑음도, 아이 특유의 풋풋함도 없는 삭막한 미소였지만 석진은 그런 태형의 얼굴에 묘하게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에 대한 동경일까. 추억에 젖은 회상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동질감? 머리를 굴리던 석진이 얼마 안 가 결론을 내린다.

 

아, 아마도 이것은 애틋함.

 

 

그래. 밥 먹자.

 

 

지금쯤 오고 있을 밥차를 마중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부여잡는 석진의 걸음이 멈춘다. 입고 있던 가운의 끝자락 어딘가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에 몸을 돌리면, 태형은 또 다시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석진을 마주하고 있다.

 

 

“오늘은 아저씨도 같이 밥 먹어요. 여기서, 나랑.”

 

 

정말이지, 헤어나오기 어려운 웃음이다.

 

 

 

 

 

 

 

-

 

 

 

 

 

“야. 우리 이러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몰라. 잡혀가는 것밖에 더 하겠어?”

 

“하기사. 죽일 리가 없지.”

 

“쉿. 조용히 해라 임마들아.”

 

 

그렇게 쑥덕거리면 당연히 들키지 않것냐.

 

입술 위로 검지 손가락을 대어 보이는 호석에 다른 아이들은 곧장 입을 다문다. 호석은 빠르게 상체를 돌려 복도의 상황을 살폈다. 한 블럭만 더 가서 오른쪽 첫 번째 실험실. 유도심문 하느라 애를 하도 먹어서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눈을 떠 보니 낯선 공간이었고, 박지민과 김태형을 제외한 모두가 방에 있었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들어온 한 여자가 잔잔하고도 냉혹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뒤에야 문득 떠오른 버스 속 감독의 이상 행동. 어딘지 모르게 시끄러운 뉴스와 좋지 않았던 경기 관계자들의 표정. 영화에서나 봤던 상황이 실제로 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기엔 호석과 친구들은 몇 주를 내리 방에 갇혀 살아야 했고, 그저 따분함 뿐이던 그 시간 속에서 호석은 홀로 틈틈이 지민을 데려올 방법을 구색했다.

 

박지민. 그 다음은 김태형. 모두 빼내면 이곳을 빠져나간다.

 

그 여자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방법과 기준이 호석에게는 없었다. 설령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과연 좋은 사람일까. 우리 모두를 온전히 살려둔다는 전제하에 이곳에서 지낼 수 있는가. 만약 먼 미래에 그들의 입에 풀칠하기도 벅찰 때가 온다면, 그럼에도 우리를 계속 데리고 있어 줄까.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공간은 정말 안전한가.

 

스스로를 향한 끊임없는 질문과 불확실한 대답. 고민하는 호석의 마음을 다잡아 준 것은 확신에 찬 아이들이었고, 오랜 시간 함께 몸을 부비며 훈련해 온 그들은 의리로 똘똘 뭉친 채 결단을 내렸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코 호석 혼자만이 염두해 두고 있는 만일의 상황임이 아닐 것이다. 웃으며 그럴리가 있겠느냐 장난치던 녀석들도 이면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호석이 주먹을 쥔다. 팀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고, 녀석들이 제일 믿는 첫 번째 에이스. 김태형한테 가려졌으나 그럼에도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으며 반드시 해내어 팀의 성공에 한 뼘만치라도 영향을 주는. 정호석.

 

 

“야들아. 확 가버리자.”

 

 

단 한 마디. 시작을 알리는 단결된 목소리. 비록 지금 서 있는 이 곳이 경기장은 아닐지라도. 모랫바닥이 아닐지라도. 달려야 한다. 멈추는 순간, 경기는 끝나버리므로.

 

 

 

 

 

 

 

-

 

 

 

 

 

아저씨는 손이 참 예쁘시네요.

 

 

태형이 뱉은 말 중 대다수는 이런 식의 헌팅 멘트였고, 석진은 결국 그걸 받아주며 태형 눈앞으로 손을 내밀고 만다. 봐. 실컷. 그러면 태형은 싱긋 웃으며 그 손에 깍지를 낀다. 그런 스킨쉽을 허락한 적은 없으나 딱히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받아들이고 다시 들이대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이 흘렀다. 애처럼 응석부리지는 않았지만 찹쌀떡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탓에 석진은 주로 태형의 방 안에서 태형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직도 윗선에 태형에 관한 사실을 알리지 않아 마음이 불편했으나 태형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석진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불편함의 몇 배로 커져가는 간질거림을 잠재워야 했다. 석진은 태형을 맡은 연구원이고, 그에 따라 실험체 19호를 연구해야 한다. 즉, 다시 말해 태형의 몸 속에 있는 대부분의 피를 빼내야 하는 것도 석진이었고, 다 죽어가는 태형을 절대 죽지 않도록 돌보는 것도 석진의 몫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웃는 게 저리도 예쁜 녀석의 얼굴을 망칠 자신이, 지금의 석진에게는 눈꼽 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또 한 번 다가온 하루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대충 가운을 걸치고 나와 커피 한으로 목구멍에 기름칠을 하고, 연구실을 돌아다니며 실험체들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 후 아침밥을 들고 태형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면 침대에 걸터앉아 벽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태형이 고개를 돌려 석진을 맞이했다. 뭘 그렇게 써? 흔적을 남기는거죠. 내 흔적. 내가 여기에 몇 달을 갇혀 있었다는 증거요. 석진은 웃었다. 항상, 늘 예상치도 못했던 일을 해내는 아이였다.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젓가락으로 식판을 뒤적거리는 태형을 보며 석진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오늘은, 오늘만큼은 반드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위에서도 조금씩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이것저것 석진을 떠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당장 내일 아침 태형의 방 문을 열어젖히는 사람이 석진이 아니게 될 수도 있었다. 해야만 하는 말이 무엇이건, 그 말을 뱉어내는 사람은 석진이 되어야 한다.

 

자꾸만 몸에 들어가는 힘을 어떻게든 풀어보기 위해 눈을 세게 감아내린 석진이 쑤신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알아서 하세요 전 상관 없으니까. 무엇보다도 아저씨가 부탁하는거니까.

 

그 말을 하는 태형의 얼굴이 자꾸 석진을 괴롭혔다. 감정은 휘몰아치는 폭풍과도 같아서… 휩쓸리면 죽어버린다고. 그 문장을 버릇처럼 되뇌이며 이를 악물었다. 결국 휩쓸려버리고 만 것인가. 19호. 너는 결국 나를 쓸데없는 감정의 구렁텅이 따위로 밀어 넣어버린 것인가.

 

 

아저씨?

 

 

단말마의 부름에 석진은 화들짝 놀라 태형을 봤다. 맛대가리 없다면서 입안 가득 뭔가를 욱여넣고 오물거리고 있는 녀석을 보니 더욱 심란해진다. 애써 입꼬리를 말아올린 석진이 태형의 이마에 꿀밤을 먹인다.

 

 

“임마. 넌 왜 자꾸 날 아저씨라고 불러.”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니까요.”

 

“나 너보다 다섯 살 많아.”

 

“그정도면 아저씨네요. 내가 뭐라고 불러주길 원해요? 석진씨? 석진군? 석진아?”

 

“형.”

 

“형이요?”

 

“응. 석진이 형.”

 

 

다섯 살 아래인 녀석한테 아저씨라고 불리니까 기분이 이상하잖아. 석진의 말에 이마를 매만지던 태형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게 불러드리죠 뭐.

 

그래요. 감사하네요. 하하, 소리내어 웃는 석진의 목은 한없이 잠겨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상태이다. 그래봤자 석진 형, 하고 부르는 목소리를 오랫동안 듣지도 못할 텐데. 그래봤자 마지막은 고독이거나 씁쓸함이 뒤섞여 내게 비통함만 안겨줄 텐데. 도대체 뭘 위해 이런 짓을 벌이는가. 뭘 위해 가치도 없는 감정 소모를 자처하는가. 대답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다가 쑤신 눈을 꾹꾹 눌렀다. 입이 바싹 마르고 나오지도 않는 침을 반복해서 삼킨다. 벌려. 입술을 떼. 목소리를 쥐어짜 내. 어떻게든, 어떻게든 말을 해. 19호, 이젠 때가 왔어. 간절한 사람들에게 네 피를 나눠줘야 할 때가 왔어. 그렇게 말을 해.

 

김석진, 감정을 버려.

 

 

“형.”

 

“…….”

 

“그러면 형도 19호 말고 내 이름 불러줘요.”

 

“…….”

 

“태형아, 하고.”

 

 

빠져나올 수 없는 깊고 좁은 구렁텅이에 몸을 맞춘 기분. 미래가, 당장의 내일이 보이지 않아 막막함에도 맹렬하게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심장. 드문드문 보이는 위태로운 빛줄기 하나만을 부여잡고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다독이지.

 

 

[ 긴급상황 발생. B구역 제 1 실험실 감염자 폭주 중. 긴급상황 발생. B구역 제 1 실험실 감염자 폭주 중. 현재 사망자 3명. 무기 소지 후 방에서 대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

 

 

위태로운 것은 그에 걸맞게 끊어지기 마련인 법. 빛줄기는 어둠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되려 삼켜지고 마는 법.

 

이봐, 19호. 이제 나는 삼켜지려나.

 

 

 

 

 

 

 

-

 

 

 

 

 

초점이 흐리다 못해 정신마저 아득해진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었다. 턱 끝에서 수차례 반복적으로 헐떡이는 호흡을 되돌릴 길이 없었다.

 

 

“호, 석이, 형, 끄윽, 제발, 가.”

 

“참말로다가. 너두 참 지랄이랑께.”

 

 

결코 모르지 않았음에도. 아주 작은 희망에 목숨을 걸었는데. 결국 영화같은 것들은 전부 다 판타지였구나. 현실은 각박하고도 잔인하구나.

 

꿈틀거리는 녀석들 사이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고민하는 것도 싫어하고 생각이 깊어지면 바로 떨쳐냈는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피해내느라 축적되어 있던 고민과 걱정들이 뒈지기 직전에 몰려오는 것이 기분이 참 더럽다. 호석은 가쁜 숨을 최대한 힘주어 들이키며 지민을 봤다. 눈동자가 돌아가고, 온몸이 꺾이며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몸뚱아리를 지나 본래의 얼굴을 찾아 시선을 둔다.

 

 

“고생했다, 자슥아.”

 

“그으윽, 크, 크르륵,”

 

“다음 생에는 쪼메 오랫동안 살아보자.”

 

 

글쎄. 추억으로만 남을 우리의 기억들과 순간들이 네 머릿속에서도 나와 같이 머물러줄까.

 

그래도 뭐. 이렇게 다 같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네.

 

 

 

 

 

 

 

-

 

 

 

 

 

“응답 바랍니다.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강 박사님. 제 목소리 들려요?”

 

 

돌아오는 것은 지직거리는 전파음 뿐. 석진은 신경질적으로 무전기를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젠장.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은은히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긴급 상황임을 알리는 붉은 전조등이 복도를 물들였다. 그 붉은 것들 사이에 피가 섞여 있는지 도무지 알 턱이 없다.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고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석진을 가만히 보며 벽에 야구공을 던지고 있던 태형은 몸을 일으켜 석진의 손을 부여잡았다.

 

 

“진정해요. 일단 기다려봐요. 문 잠그고 있으라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때묻지 않은 눈동자. 괜찮지 않은 것은 결코 내가 아니라 너여야 함에도 오히려 네가 나를 다독이는 구나. 석진이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거칠게 울렁였다.

 

 

“B구역 제1 실험실. 네 친구가 있는 곳이야.”

 

“네?”

 

“박지민이 갇혀 있는 곳이라고.”

 

 

어렴풋이 짐작은 가능했다. 결코 나올 수 없도록 설치된 철창을 건드린 것이 누구일지, 그런 무지한 행동이 어떤 해프닝을 가지고 왔을지. 어쩌면 태형의 친구일 그들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석진은 태형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등 뒤의 태형은 침묵했다. 석진의 손을 잡아주었던 온기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진압이 가능할 정도인가. 생존의 가능성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가. 잠자코 기다리면 해결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상황이 나쁘다면 이 틈에 나가 식량이라도 가져오는 것이 나았다.

 

방 안을 어지럽게 헤집으며 돌아다니던 석진의 걸음걸이가 우뚝 멈췄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득한 생각. 석진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태형을 향했다.

 

백신. 백신을 맞아야 한다.

 

태형의 항체는 바이러스를 먹는다. 즉, 자가치유가 가능하다. 오랜 연구를 지속해오며 봤던 논문 어딘가에서 읽었던 것도 같았다. 항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주위에서 알짱거리다가 먹혀버리는 바이러스도 있다고.

 

백신을 맞으면, 우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석진은 서둘렀다. 방법이 없었다. 확신이 없었음에도 해야 했다. 진압이 가능했다면 진작에 됐었어야 한다. 다급함에 무작정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던 석진이 잠시 주춤거리다 이내 걸음을 멈췄다. 빠르게 몸을 돌려 가만히 서 있는 태형의 앞으로 걸어간다. 초점이 잡히지 않아 제 마음대로 돌아가 있는 태형의 양 뺨을 부여잡고 들어올려 눈을 맞춘다.

 

 

“네 피로 백신을 만들어서 나한테 주입해야 해. 항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좀비가 인식하지 못 할 수도 있어. 더 늦으면 가망이 없어. 지금 빨리 나가서, 내가 필요한 도구들을 가져올게. 들어가려면 지문이 필요해서 네가 갈 수도 없어. 내 말 이해했어? 알겠지.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절대 나오지 말고. 내가 문 두드리면 열어줘. 세 번 두드릴거야. 응?”

 

 

태형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석진은 이를 악물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의 뺨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떼고, 뒤를 돈다. 살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19호.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문짝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식은 땀이 이마에서 턱으로, 발치 아래 어딘가로 떨어진다.

 

 

“형.”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문을 열 수 있는데. 피가 튀기는 전쟁터같은 곳이 눈앞에 놓여져 있는데. 석진은 힘없이 뒤틀린 몸뚱아리와 붙잡힌 뒷목, 순간적으로 가해지는 힘에 속박되어 눈을 감았다. 형. 그 단어 하나로 시작된 거침없는 입맞춤을 받아들인다.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감정을 막지 못해 그대로 삼켜지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입맞춤을. 그 순수한 뜨거움을 느낀다.

 

 

“혼자 어딜 가요.”

 

“…….”

 

“같이 가요. 불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거침없이 쏟아지는 태양. 석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참히 빛나는 것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다.

 

애석하게도 그 찰나의 순간에 김석진은 19호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직감했다.

 

 

 

 

 

 

 

-

 

 

 

 

 

“여기에서 제일 가까운 곳. B동 제1구역밖에 없어. 근처의 다른 곳은 실험체들이 몰려 있어서 위험하고, 갇혀 있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우리가 들어가겠다고 설쳤다가 그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가요. 거기.”

 

 

뭐라도 되겠죠. 끽해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불안한 듯 맞잡은 손이 축축했다. 태형은 그저 입꼬리를 씰룩이며 석진의 넓직한 등짝을 바라봤다. 듬직한 척하는 마음 약한 한 마리의 양 같은데. 믿어도 되나 싶지만 자신이 앞장서기엔 길을 모르니 안 됐다. 태형은 주머니에 넣어둔 공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에 쥐여진 석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복도는 조용했다. 방금 전의 그 끔찍한 비명소리가 오가던 곳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적나라한 정적이었다. 한기까지 돌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복도를 지났다. 바닥과 벽 곳곳에 어지럽게 튀어오른 핏자국들은 한가득이었으나, 그것의 주인들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 블록만 더 가면 돼.

 

 

속삭이는 목소리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냈다가는 앞에 있는 석진이 괴성을 질러대며 나자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세 좋게 혼자 가겠다며 떵떵거리더니. 덜덜 떨리는 어깨죽지를 보며 태형은 고개를 내저었다.

 

코너만 돌면 돼.

 

그 한 마디에 기대어 온 몸에 주고 있던 힘이 반쯤 풀리려던 순간이었다. 앞서 가던 석진의 걸음이 멈췄다. 생각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던 태형의 석진의 등판에 가로막혀 얼굴을 부딪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멈춘다. 왜 그래요? 말을 내뱉는 태형의 입이 곧장 틀어막혔다. 마주한 석진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식은 땀이 곱절로 흐르고,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태형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무의식적으로 알아챘다. 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로만 들었지,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을 직면한 뒤 든 생각은, 뭐랄까. 워킹데드인지 부산행인지에 나오는 녀석들은 상당히 양호한 것이었다는 것. 현실에서의 녀석들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포악했고, 잔인했고, 강했다. 벽에 처박힌 시체들은 전부 목덜미부터 복부의 살갗이 찢겨진 채 내장들이 태형을 향해 안부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완전히 감염되기 전인지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들이 완전히 변해 눈을 뜨기 전에 이곳을 지나가야 했다. 복도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녀석은 한 마리. 태형이 석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더 세게 쥐었다.

 

형.

 

그 한 마디를 들은 석진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처참해졌다. 태형은 알고 있음에도 불렀다.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불러라. 더 불러라. 그 목소리의 끝자락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

 

형.

 

석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가자. 굳은 의지로 뭉친 목소리에 태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리. 그 녀석을 지나쳐 열 걸음 정도. 우측에 도착지점이 있다. 석진을 벽 쪽으로 밀어넣은 태형은 석진의 왼쪽에서 걸었다. 불확신 속에서 살고자 손을 댄 도박이다. 제발 몰라라. 제발. 속으로 백 번 천 번이고 중얼거리며 태형은 석진의 팔을 부여잡고 걸음을 뗐다. 사방에 늘어진 시체들이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달려들 것만 같았다. 서서히 멀어져가는 녀석을 눈알만 굴려 살피던 석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돌아가는 녀석의 고개. 태형의 목구멍이 무의식적으로 막혔다.

 

살면서 이렇게 끔찍한 괴성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패배의 울부짖음이나 죽음을 슬퍼하는 소리보다 더 듣기 싫은 소음이 존재할 줄 몰랐다. 태형은 미친듯이 달려오는, 정확히는 석진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팔과 다리가 정지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석진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이제 끝인가. 주머니 속으로 쑤셔넣은 손바닥 위를 부드럽게 돌며 느껴지는 가죽과 실밥의 감각. 이 와중에도 이 감각이 왜 그리도 그리운 건지.

 

바람이 불었다. 사방면이 틀어막혀 산소나 제대로 통하는지 의심되었던 공간에서 바람이 불었다. 번쩍 눈이 뜨인다. 시야를 가득 채운 시꺼먼 뒷통수. 또 다른 고함.

 

 

“미친새끼야아-!”

 

 

그것은 누구를 향한 육두문자인가.

 

귓가를 때려박는 전라남도 사투리가 첫 만남을 상기시킨다. 낯설고, 시끄럽고, 귀찮았던 사람. 에이스란다. 태형은 비웃었다. 죄송한데, 그 자리는 제 거예요. 웃는 면전에다 대고 침을 뱉은 격이었다. 한껏 동결된 녀석들 사이에서도 그는 웃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태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말의 경계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려. 네 맘대로 날뛰어 봐라잉.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제일고등학교 고교 야구부 에이스 김태형. 에이스 자리에서 밀려나면 그런 희망찬 웃음은 짓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강했다. 승리를 이끌어낸 태형을 향한 그의 환호성에는 진심만이 담겨져 있었다. 태형의 패배였다.

 

어디서 들고 왔는지 야구 배트를 가로로 쥐고 달려드는 녀석의 입에 쑤셔박은 호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태형을 향해 소리쳤다. 얌마. 그동안 잘 지냈다냐? 급나 피골이 상접했네잉. 슨상님, 야 밥 안 먹였당께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호석을 보던 석진의 시선이 아래로 가다 멈춘다. 찢겨진 옷자락과 뜯겨나간 팔뚝의 살갗.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몸은 힘의 차이 때문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석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말없이 자신을 보는 석진에 호탕하게 웃던 호석이 한숨으로 허공을 갈랐다.

 

 

“슨상님. 태형이 살려줄 겁니까?”

 

“…….”

 

“태형이가 말이지라. 허벌라게 실력 있는 투수랑께요. 전국으로 나가서 빛을 봐야 하는디 말예요. 나가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는디.”

 

“…….”

 

“슨상님. 태형이 살릴 거지요잉? 그럴 수 있지요?”

 

“응. 할 수 있어.”

 

 

야구 배트를 쥔 손을 본다. 태형은 그 엉망이 된 손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했다. 공을 던진 흔적. 오래된 것이 아닌 최근의 것. 연습을 했구나. 여기서도 꾸준히. 그의 상처가 벌어지고 핏덩어리가 바닥 위로 떨어져 내린다. 와중에도 호석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럼 살리랑 께요. 나는 이제 미련 없응께.”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시합 직전 경기장을 가로지르며 울려퍼지던 호석의 고함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태형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러다 목구멍마저 찢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며, 호석은 앞으로 나아갔다. 찌그러진 야구 배트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침을 질질 흘리는 녀석을 끌고 복도를 걸어갔다. 마침내 그 모습이 코너를 돌아 사라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괴성 소리와 난무하는 둔탁한 소음을 듣고서야 석진은 걸음을 뗐다. 망부석처럼 서 있는 태형을 붙들고 끌어 실험실 문을 열어젖힌다.

 

살려야 한다. 약속이었다.

 

 

 

-

 

 

 

거즈. 주사기. 알코올. 바늘.

 

간단 명료하게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도구들을 훑던 태형은 썩 좋지 않은 석진의 표정을 살폈다. 뭐 대단한 작업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이게 다예요? 태형의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석진의 꺼질 듯한 한숨 뿐. 착잡한 듯 머리를 쓸어넘긴다.

 

 

“어쩔 수 없네. 아까 전에 여기서 한바탕 난리가 나서 전부 다 깨져버리고 망가졌어. 네 피를 나한테 주입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겠어. 문은 잠궜지?”

 

“네. 그런데 여기는 아무것도 없네요. 지민이가 있었던 곳이라고 들었는데.”

 

“… 아마 여기서 진압을 못했을 거야. 네 친구들도 다 감염된 상태로 여기를 빠져나간 것 같아. 그래봤자 이 건물 어딘가에 있겠지만.”

 

 

태형의 팔을 부여잡고 혈관을 더듬던 석진이 그대로 바늘을 꽂아 넣었다. 플라스틱 통 안 가득 차오르는 검붉은 피를 보니 방금 전 처참히 훼손되어 있던 시체들이 떠올라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혈액형 뭐야?”

 

“O형이요.”

 

 

피가 묻어 나오는 바늘을 거즈로 닦아내고, 곧장 자신의 팔에 주사한다. 아프지도 않은가. 다소 과격하고도 일말의 망설임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석진의 행동을 태형은 조용히 지켜본다.

 

 

“다행이네. 난 AB라 괜찮아.”

 

“그런데 그걸 왜 지금 물어봐요?”

 

“그냥 궁금했어. 어차피 혈액형 달라도 넣을 거였어.”

 

 

이 지경까지 왔는데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어. 담담히 말을 뱉어내는 석진의 얼굴을 태형은 참으로도 멀뚱히 응시하다가 팔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진다. 뜨거워. 형은 참 뜨거운 사람이네요. 자신의 얼굴에 닿은 손을, 그리고는 이내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얼굴 이곳저곳을 훑는 손 끝을, 석진은 고요히 느끼며 주사 바늘을 뽑아냈다. 송골송골 맺힌 핏방울 위로 소독약을 묻힌 거즈가 덮였다.

 

피가 온몸에 퍼져 항체가 생기기까지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 과정이 잔잔할지 거친 파도 같을지 몰랐기에 어떤 극한 상황이 와도 버텨내야 했다. 실험실을 돌아다니며 무기가 될만한 것을 찾았으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닥 이곳저곳을 나뒹구는 다 깨진 비커 조각들 정도. 커터칼 하나 없이 휑한 실험실을 돌고 돌다 석진은 이내 머리를 짚었다.

 

어쩜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어. 머릿속이 휑해지고 꽁꽁 숨겨놨던 두려움이 치솟기 시작했다. 항체가 몸속에 제대로 자리잡는 것만으로도 행운이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외부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연구원이 이곳뿐인 것은 아니었으니 다른 연구원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전멸된 연구소에서 홀로 살아남은 석진과 태형을 추궁할 것이었고 자칫 잘못했다가 태형에게 항체가 있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이거 큰일이군. 몰려드는 어지러움에 석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테이블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입술을 벌려 태형을 부른다. 거기 뭐 좀 있어? 차가운 적막. 그 온도가 너무 낮아서, 석진은 벌벌 떨리는 손을 비벼 열을 내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희뿌연 시야가 원래대로 되돌아올 때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돌아가던 석진의 목덜미는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잠긴 줄 알았던 문은 열려 있었고, 열린 문턱을 반쯤 넘은 발은 지민의 것이었으며, 태형은 문 옆에 주저앉아 이미 인간으로써의 본능을 잃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옛 기억.

 

저 문은 이미 고장난지 오래였다.

 

그 순간에 석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민아. 한없이 달콤한 태형의 음성에 돌아간 지민의 고개와 뻗어진 팔. 당장이라도 닿을 것만 같이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를 보며 석진은 생각이 아닌 본능으로 움직였다. 병적인 다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희생? 그딴거 왜 하는지 이해도 안 되고.

 

 

“김태형!”

 

 

젠장.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돼. 그런데, 그런데 태형아.

 

아아. 모르겠다. 이젠 나도 나를 모르겠어. 그냥 내가 너를 지독히 사랑하나 보다.

 

 

 

 

 

-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사지가 떨리며 힘이 빠지는 바람에 몇 번이고 놓칠 뻔한 팔을 겨우 부여잡기를 수십 번. 입안에서 피비린맛이 났다.

 

세상이 돌았다. 머리에서 흐르는 것이 땀이 아니라 핏덩어리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는 몸뚱아리의 주인이 김석진이 아니라 나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목덜미에 유리 조각이 사정없이 꽂힌 채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워 바스락대고 있는 지민을 지나쳐 작은 창고로 향한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버티고 버텨 석진을 방안으로 밀어넣은 뒤 문을 걸어 잠근 태형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라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지민의 엉망이 된 손 끝이 태형의 이마에 닿는 순간, 뛰어든 석진이 지민을 밀쳐냈고 육탄전에서 밀렸다. 하루종일 실험 도구나 만지작거리며 숫자를 읽고 적어대는 사람의 힘이 괴물을 능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 그랬어요. 무모하고 멍청하게.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축축한 것이 손바닥을 지나쳐 팔뚝으로, 허벅지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차마 김석진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죽어가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옷깃을 부여잡는 힘이 전해졌다. 그 작은 힘에 이끌려 추락한 팔 아래로 석진의 얼굴이 보였다. 생기는 커녕 영혼도 사라져버린 듯한 눈으로 태형과 눈을 맞추는 석진을 태형은 말없이 끌어안았다. 씨발. 씨발.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빠져나가는 욕지거리를 참을 수 없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김석진의 손도, 뜨거웠다. 고개를 처박은 피투성이인 목덜미도 여전히 뜨거웠다. 데일 것 같았다.

 

 

 

태형아.

 

씨이발.

 

김태형.

 

이제야 내 이름을 부르면 어떡해요.

 

사랑해.

 

늦어도 한참 늦었잖아요. 내가 형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밖에 안 남았잖아요.

 

 

 

덜덜 떨리는 손아귀와 고개가, 머리카락과 귓가에 닿았던 입술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태형은 축 늘어진 몸을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물린 상처 주위로 퍼져나가는 검은 핏줄을 지켜보던 태형이 몸을 일으킨다. 창고 바닥 위에 곱게 눕혀진 석진의 몸을 지나 책상 위에 늘어진 이름 모를 도구 중 아무거나 집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산산조각이 나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유리조각을 더듬어 제일 커다랗고 날카로운 것을 집어든 태형은 석진의 곁으로 되돌아간다. 얇고 곧은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주머니에서 야구공을 꺼내든 태형이 그것을 석진의 입에 물렸다. 감염이 진행되는 속도가 매서울 정도로 빨랐다. 입에 무언가가 들어오기 무섭게 강한 힘으로 이를 박아놓고 놓치지 않는 석진의 모습을 보며 태형은 불규칙적인 숨을 골랐다. 그리곤 손에 쥔 유리조각을 들어 올렸다. 그 울퉁불퉁한 형체가 태형의 목덜미를 가르고 들어오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석진이 물린 곳과 같은 자리였다.

 

몸이 모로 무너져내리며 석진의 위로 떨어졌다. 상처를 중심으로 그 어떤 감각도 존재하지 않는 것 마냥 고통이 없었다. 얼핏 고개를 들어 올려 본 석진의 얼굴은 물기로 가득 번져 있었다. 김석진은 울고 있었다. 태형은 눈을 감아내렸다. 콧속을 간지럽히는 은은하고 아련한 것이 피냄새가 아닌 석진의 향기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스운 인생. 우스운 사랑. 태형은 파도였고, 석진은 그에 휩쓸려주는 고독한 방랑자에 불과했으니. 그가 고독하지 않도록 죽는 순간마저도 함께해야 했다.

 

 

딱히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공을 쥐고 하늘만 보고 살았다.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있을 이상과 꿈. 저곳에 닿을 미래만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좇고자 하는 것이 생겨버린 순간 차단되는 세상. 그 감각은 겪어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겠지.

 

좇고자 하는 것이 생겼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김석진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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